이번에는 부처님은 어디에 계신가, 부처님은 어떻게 계신가, 부처님에 대해서 말씀을 리겠습니다.
부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디에 어떻게 계시는가 하는 것은 광장히 중요합니다.
왜나하면 부처님은 바로 불교의 주인이십니다.
불교는 부처님에 의해서 성립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불교는 그 기본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번 법회에는 그 부처님의 위신력과 근본이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32상과 80종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그 용모부터가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셨습니다.
도저히 범상한 사람과는 전혀 같지 않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시면서부터 한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하셨습니다.
하늘위에서나 하늘밑에서나 오직 내가 높다고 외치셨습니다.
천지만물이 다 부처님의 탄생을 경축했습니다.
아시타라고 하는 선인(仙人)은 부처님을 보고 마냥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아시타 선인은 부처님을 보시고 눈물을 흘렸는지 정반왕과 마야부인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시타 선인은 이렇게 말씀을 하였습니다.
"제가 지금 이 태자의 모습을 보니, 이 세상에서 정치를 한다면 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해서 수도를 한다면 부처님이 되어서 일체중생을 구제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태자의 모습은 반드시 출가수도를 해서 부처님이 되어 일체중생을 제도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내 자신은 이미 나이가 많아 부처님의 교화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 마냥 안타깝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인도의 풍속으로는 어린 왕자가 탄생을 하면 신전(神殿)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 하나의 법도였습니다.
때문에 싯달타 태자를 데리고 사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사당에 싯달타 태자가 들어가자마자 천신들이 모두 일어나서 싯달타 태자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곧 자비이시다
이러한 모든 것이 부처님은 하나하나가 범상한 사람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어째서 그런가 하는 문제를 <증일아함경> 제20권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리에 공양하는 사람은 곧 나에게 공양하는 것이며, 진리를 본 사람은 곧 나를 본 것이다.
이미 진리가 있으면 내가 있나니라."
(基有供養法하면 則恭敬我요 己其觀法者면 則觀我며 己有法則有我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에 공양하는 사람은 곧 나에게 공경하는 것이며, 진리를 본 사람은 곧 나를 본 것이다.
이미 진리가 있으면 내가 있나니라. -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상천하에 부처님처럼 높은 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진리 그 자체보다 높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특수한 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부처님의 신통력과 자비 -
제일 먼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께서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성불을 하시고 녹야원에 가서 다섯 비구에게 설법을 하시기 위해서 녹야원에 당도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이 다섯 비구들은 본래 싯달타 태자로서 수도하시던 부처님을 옆에서 시중들고 같이 수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실달타 태자께서 무료한 고행만 하여 가지고는 도(道)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포기하는 것을 보고 싯달타는 타락했다고 오해를 해서 싯달타 태자 곁을 다 떠나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싯달타 태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때에 이 다섯 비구들은 멀리서 부처님이 오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멀리서 보았을 때는 서로 감정이 안 좋기 때문에 싯달타 태자가 우리 곁에 가까이 온다 하더라도 전혀 일어나지 말고 인사도 하지 말자고 서로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점점 가까이 가까이 오실수록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이상한 충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섯 비구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 점점 가까이 오시는 순간 서로가 약속이나 한 듯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서 부처님을 정중히 맞이했습니다.
또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후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해탈을 한 사람은, 부처님을 포함해서 여섯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탄생했고, 이 때에 말씀을 하신 중도(中道)의 진리로서 팔정도(八定道)의 진리가 설해졌습니다.
이리하여 녹야원에서는 우렁찬 불, 법, 승 (佛法僧) 삼보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부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면을 하나 들어본다면 설법을 시작한 지 약 5년 만에 3가섭을 제도한 일입니다.
이 가섭은 삼형제로서, 100살이 넘은 고령들인 동시에 천 명이 넘는 제자들을 인도하는 교단의 지도자였습니다.
이들은 인도 전통적인 종교 의식으로서 태양을 숭배하고 불을 숭배하고 용(龍)을 숭배하던 교도들입니다.
이때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삼형제의 가섭을 제도하고자 하는 뜻에서 그 독룡을 섬기는, 독룡의 처소에 하루 저녁 주무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독룡이 있는 곳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무신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나, 그 독룡에게 희생을 당할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사코 요청을 해서 그 독룡이 있는 곳에서 주무시게 되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밤중에 독룡은 부처님을 향해서 불을 내뿜고 독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가서, 다시 부처님께서 불빛을 밖으로 내뿜는 삼매의 세계에 들어가서 독룡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이 용은 점점 몸의 부피가 작아졌고, 나중에는 부처님의 발우 속에 조그만 미물(微物)로 변하여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 이튿날 삼형제의 가섭들은 틀림없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용에게 희생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찾아와 보았습니다.
그러나 뜻밖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엄연히 앉아 계시었고, 그 앞에는 발우(鉢盂:인도에서 쓰던 수도자의 밥그릇)가 하나 놓여져 있었으며, 그 발우에는 조그만 미물이 허우적거리고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어냐고 여쭈어 보았을 때 부처님께서는,
"당신들이 지금까지 섬기던 독룡을 사로 잡아서 이 그릇에 담아 놓았노라"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삼형제의 가섭들은 마음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은 다음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도저히 보통사람이 아니고 완전히 불가사의한 성인인 동시에 완전한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서로가 의논하여 부처님에게 개종(改宗)하고 부처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그들의 1천여 명의 제자들은 그 스승들을 따라서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교화를 시작하신 지 불과 5년 만에 천 이백 명이라고 하는 제자를 얻게 된 것인데, 세 가섭의 교도들이 일시에 부처님께 귀의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뿐 아니라 인도의 그때 당시에는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으며, 그 종교지도자들 사이에는 서로가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지도자와 종교지도자 사이에는 모략과 시기 알력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부처님의 교세(敎勢)가 날로 번창하고, 부처님의 명성이 날로 인도 전역에 파급되는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다른 이교도(異敎道)들은 여러가지로 부처님을 모함하고 부처님에게 어떠한 위신 추락이 될 만한 일을 찾아내기에 바빴습니다.
이 때에 이교도들은 한 거리의 직업여성을 선택해서 그 사람을 매수해 가지고 부처님의 위신을 추락시키고자 했습니다.
이 여인은 밤낮으로 부처님이 계신 사원(寺院)의 주위를 맴돌면서 이침 일찌기 부처님을 참배하러 가는 사람네들을 붙잡고,
'나는 어제 저녁에 석가모니 부처님 계신 곳에서 잠을 자고 왔다, 오늘 저녁에도 또 가서 잠을 잘 것이다.'
이러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이 여인은 어느날 많은 사람이 부처님 주위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데, 배가 동산처럼 부르게 꾸며 가지고 나와서 부처님에게 해괴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아기를 가졌다, 당신이 나를 통해서 육체적 즐거움을 누렸으면 그 책임을 져라."
이렇게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 때에 하늘에서 제석천왕(帝釋天王)이라고 하는 신이 부처님을 돕기 위해서 신통으로 기적을 나타내 가지고 조그마한 쥐로 변하여 그 여인의 치마끈을 쪼았습니다.
그리하여 치마끈이 스르르 풀리면서 그 사람의 배 위에 놓여져 있던 박이 땅으로 떨어져 그 여인은 전혀 임신한 상태가 아니고 오직 부처님을 모함하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고 하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된 일도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와 같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기적적인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그 가운데 또 하나 기억에 남을만한 것은 앙굴마라(Agulimala)라고 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인도의 재래적 교육방침에 따라서 어떤 스승을 모시고 독실하게 그 스승의 가르침을 받던 순박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때 이 청년은 스승 아내의 모함을 받아서 그 스승으로 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스승은 청년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기 위해서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지시를 해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너는 이제 다른 학문은 상당히 됐으나 마지막으로 하나의 과정이 남았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는, '이 마지막 한 과정은 지금부터 백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서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든다면 그것으로 너의 학문은 모두 끝마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청년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거리에 나가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게 되었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손가락을 끊어서 목걸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마지막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만 더 해치면 바로 백 사람이 되고, 백 사람의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는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살인마 청년 앙굴마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뵙는 순간에 해치고자 하는 생각이 일시에 사라지고 스스로 부들부들 떨려서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앙굴마라 청년은 자기 스스로의 공포 때문에 오히려 부처님을 향해서 꼼짝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서 있으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꼼짝하지 말고 서 있으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할 말이 아니고, 네 스스로에게 해야 할 말이다. 나는 처음부터 가만히 있었노라."
이렇게 태연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때 앙굴마라는 스스로 땅에 엎드려,
"제가 잘못했으니 저를 용서해 주십시요."
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 살인마 앙굴마라는 부처님에게 제도되어 과거의 잘못을 전부 씻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도 부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제도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나운 코끼리도 부처님 곁에 오면 순한 양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도사회 강대국들의 모든 왕들도 부처님을 진리의 스승으로서, 진리의 구현자로서 정중히 모시고 받들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가 부처님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힌 일이고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다시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정치의 일곱가지 법칙 -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마가다 국 영축산에 계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가다 국의 아사세 왕은 밧지 국이라는 나라를 치려고 대신 우산을 보내서 부처님께 그 의견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밧지 국은 요즘에 와서 잘 말도 듣지 않고 앞으로 마가다 국을 공격할 위험성이 있으니 지금 우리가 그 나라를 미리 치는 것이 어떠냐, 이러한 의견을 부처님께 여쭈어 본 것입니다.
이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우사라고 하는 대신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고 뒤에서 부처님께 부채를 부치고 있는 아란 존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셨습니다.
"아란아! 밧지 국 사람들은 요즈음도 서로서로 모여서 올바른 일을 의논하고, 서로 회의를 자주 하고 있느냐?"
이렇게 물으셨읍니다.
이 때 아란 존자는 그렇다고 대답을 올리니까,
"그렇다면 그 나라는 길이 길이 영화로울 것이요, 아무도 그 나라를 침범할 수 없다."
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여 질문하셨습니다.
"밧지 국 사람들은 임금과 신하가 화목하고 순응하여 상하관계에 있어서 서로 공경하는 사회로 되어 있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 때 아란 존자는 그렇다고 대답을 올리니까,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길이길이 편안할 것이다."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여 질문하셨습니다.
"밧지 국 사람들은 과거의 전통적 법도를 잘 알고 예의를 잘 지켜서 어긋남이 없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아란 존자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밧지 국 사람들은 부모를 잘 섬기고 스승을 잘 모시느냐?"
질문하시자 역시 그러하다고 답변을 올렸습니다.
"또 밧지 국 사람들은 과거의 전통과 종묘(宗廟)를 잘 받들고, 조상의 신들에게 공경을 다하느냐?"
이렇게 아란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아란 존자는 그러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밧지 국 여인들은 추한 행동이 없고, 말씨와 행동이 정직하고 순결하냐?"
이렇게 아란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아란 존자는 역시 그러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밧지 국 사람들은 스님들을 잘 받들고, 종교지도자들을 잘 받들고, 계율을 중시하는 지도자를 잘 받들어서 높이 모시고 공경하고 보호하는 일에 게으름이 없느냐?"
이러한 부처님의 질문에 아란 존자는 다 그러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일곱 가지 항목 중에 부처님이 답변하시기를, '만약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것이고, 안녕할 것이고 부강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아함경》 제 2권에 있는 내용으로서 원문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數相集會 講義正事不 (수상집회 강의불사불)
(2) 君臣和順 上下相敬不 (군신화순 상하상경불)
(3) 奉法曉忌 不違體度不 (봉법효기 불위체도불)
(4) 孝事父母 敬順師長不 (효사부모 경순사장불)
(5) 恭於宗廟 到敬鬼神不 (공어종묘 도경귀신불)
(6) 閨門眞正 潔正無? 到於戱笑言不及아不 (규문진정 계정무? 도어희소언불급아불)
(7) 宗事沙門 敬持威者 膽視護養未상해捲不 (종사사문 경지위자 담시호양미상해권불)
이렇게 아란 존자에게 하시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대신 우사는 부처님에게 말씀올리기를,
"이 가운데 한 가지만을 지킨다 하더라도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일곱 가지를 다 지키는 밧지국은 누구도 침략할 수 없고 정복할 수 없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물러갔습니다.
이것은 바로 전쟁을 하고자 하는 강대국에게 전쟁이 어떤 것인가를 미리 알게 해 막은 것이며, 정치에 있어서 국민을 선도하고 교화하는 데 기본 항목으로서 일곱 가지 기조를 말한 것으로, 국가의 칠불쇠(七不衰), 이 일곱 가지가 있으면 쇠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기본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덕이 높은 범마니 비구 -
또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려고 할 때 범마나라고 하는 비구가 부처님 곁에 있었는데, 부처님은 아란 존자에게 범마나 비구를 부처님의 신변에서 멀리 물러가 있도록 지시를 하셨습니다.
아란 존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범마나 존자는 항상 부처님 곁에서 시봉하고 공양을 올리면서 수발을 해 왔는데, 마지막 열반에 드시는 이 찰나에 부처님 곁에서 범마나 비구를 물리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자 하는 구시라 성은 사방 몇십 리가 되도록 모든 신들이 부처님께 경배를 드리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기 위해서 송곳 하나 꽂을 틈도 없이 꽉 차도록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는데, 범마나 존자가 부처님 곁에 서 있으니 그 신들이 접근할 수가 없어서 그 신들이 범마나 존자를 혐오하고 있고, 범마나 존자 때문에 부처님께 접근하지 못하는 것을 안 좋게 생각하기 때문에 범마나 비구를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아란 존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범마나 존자는 어떻게 하여 그와 같은 능력을 성취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비구는 과거생 과거생에서부터 많은 수도를 하고, 과거 부처님에게 등불을 잘 바쳐서 올렸기 때문에 오늘날에 이와 같은 광명이 찬란한 능력을 성취해서 다른 신들이 도저히 이 범마나 비구의 광명을 당할 수 없게 되었다."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부처님은 우주만상의 진상을 볼 때 보통 인간이 보지 못하는 또 하나의 안목이 있고, 또 하나의 관찰 능력으로서 이 불안(佛眼)의 세계를 성취하신 분임을 뜻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일반 사람들과는 전혀 그 정도를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면을 갖추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최후의 말씀으로 열반에 드실 때 이러한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여라. 모든 현상은 변한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장아함경》에 있는 말씀으로서,
無爲放逸 我以不放逸 무위방일 아이불방일
故自致正覺 無量衆善 고자치정각 무량중선
亦由不放逸得 역유불방일득
一切萬物 無常存者 일체만물 무상존자
此是如來末後所說 차시여래말후소설
[게을리 지내지 마라, 나도 게을리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해탈을 이루었다.
한없는 좋은 일이 게으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일체 만물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여래의 최후의 말씀이다.]
이러한 말씀으로서, 게으름없이 정진하라 하는 말은 중도적(中道的) 실천, 자비의 실천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모든 현상은 변한다 하는 것은 바로 연기법(緣起法),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다가 인연에 의해서 사라진다고 하는 그 연기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에 깨달은 진리도 연기이고, 중긴에 말씀하신 진리도 연기이며, 마지막으로 강조하신 것도 연기입니다. 이 연기의 원리에 의해서 처음에 강조한 것도 중도요,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도 중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아함경》에서는 '차시여래 말후소설'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래께서 제일 마지막에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을 적에 가섭 존자가 많은 제자들을 이끌고 늦게 도착해서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그 겹겹이 쌓인 옷과 여러 겹으로 둘러져 있는 관 안에서 두 발을 그대로 가섭 존자에게 내보이셨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아함경》의 곽시쌍부(槨示雙趺)입니다.
이것은 또한 어떤 부처님의 기적인가 하면,
이에 중요한 것은, 관 안에서 두 발을 밖으로 내보이신 진정한 뜻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바로 영원한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이며 영원한 광명입니다.
부처님은 진리요, 부처님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형상이 열반에 드는 것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실상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 관 안에서 두 발을 보이신 중요한 뜻입니다.
여기에 부처님의 실상이 있고, 불교 진리의 본래 면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부처님의 참다운 세계를 모릅니다.
그리하여 중생들은 육체의 소멸만을 애통해 하기 쉽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영원한 진리와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곽시쌍부 입니다. 연기법에 의한 중도행은 불교의 모든 것입니다.
- 석가모니 부처님은 전생에 성불하신 분이시다 -
부처님의 세계가 진정 이러할 때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일어납니다.
부처님의 기적과 능력과 쉼터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위신력이 있고 그와 같은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세계를 성취하시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부분에 대하여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금생에 이 세상에 나오셔서 성불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전생, 그 전생,억만 겁 전생에서부터 성불하신 부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성불하시는 모습을 보이시고 설법하는 모습을 보이고, 또 수도하시는 모습, 실달타 태자로 계시던 모습을 모두 보인 것은 자신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고 오로지 중생을 위해서, 중생의 해탈을 위해서, 중생의 성불과 만족을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며, 부처님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부처님의 자비 방편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전생에 무한한 공덕을 쌓으시고, 무한한 능력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이 세계는 오로지 부처님의 세계로 이룩해 놓으셨지만, 다시 하나의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셔서 수도와 고난과 성불과 설법과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이신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종교적 신념을 주고 용기를 주고 실천을 권장하고 북돋아서 중생들이 다 해탈의 세계에 갈 수 있고 만족과 기쁨의 세계에 갈 수 있도록 하는 자비의 방편이지 그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이고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시는 근본입니다.
뿐만아니라 《법화경》 약초유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여래(如來)며 응공(應供)이며 정변지(正遍知)며 명행족(明行足)이며 선서세간해(善逝世間解)며 무상사(無上士) 며 조어장부(調御丈夫)며 천인사(天人師)며 불(佛)이며 세존(世尊)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입니다.
보통 여래십호(十號)라 합니다.
십호의 뜻을 간략히 서술해 보면,
① 여래 : 여래는 진리 자체로 존재하며, 이 세상에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진리 자체로써 오고가시는 것을 말한다.
진리와 함께 계시고 진리와 함께 오시고 진리와 함께 가시는 분이 바로 여래입니다.
여래는 바로 진리 자체를 의미합니다. (진리와 인격이 하나가 된 것이 여래이다.)
② 응공 : 응할 응 자, 공양이라는 공 자, 부처님은 이 세상의 누구로부터도 공양의 대상이 되고, 공양에 응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음을 뜻한다.
③ 정변지 : 모든 상황과 진리를 가장 올바르고 보편 타당하게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④ 명행족 : 지혜와 실행이 만족한 것을 의미한다.
⑤ 선서세간해 : 세상에서 모든 집착과 애착으로부터 감정이 잘 떠났다는 뜻에서 착할 선 자, 갈 서 자이다.
잘 초월했지만 그러면서도 세상의 모든 사정을 잘 안다고 해서 세간해라고 한다.
⑥ 무상사 : 가장 높은 사람을 의미한다.
⑦ 조어장부 : 중생을 잘 길들이고 순응하게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을 잘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⑧ 천인사 :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의 스승임을 뜻한다.
⑨ 불 :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 해탈을 성취한 분이라는 의미이다.
⑩ 세존 :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기 때문에 세상 세 자, 존귀할 존 자를 쓰는 것이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도받지 못한 자를 인도하며, 괴로운 이를 즐겁게 하며, 알지 못하는 이를 알게 하며, 편안치 못한 이를 편안하게 하며, 해탈하지 못한 이를 해탈하게 한다.
나는 현재와 미래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며,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으며, 진리를 깨우치며 진리를 말하고 있다.
너희들 천인 아수라들은 다 나에게 와서 나의 설법을 듣고 해탈의 세계를 성취하라."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선언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내용으로 《법화경》 비유품에서도 다시금 일대 선언을 하십니다.
비유품에서 부처님은 사리불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모든 성인 중 가장 높으며, 이 세상의 아버지이다. 일체 중생이 다 나의 아들[자식]이니라."
이렇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 이 삼계가 다 나의 소유이며, 나의 국토이며, 그 가운데 모든 중생이 다 나의 아들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환란이 많으므로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이 세상의 고통을 구제하고 중생을 보호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법화경》 비유품에 나오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 부처님은 모든 중생의 부모이시다 -
부처님은 세상의 아버지이십니다.
부처님은 진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세상은 진리를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진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일체중생이 다 나의 아들이라고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어떻게 해서 성립이 되느냐 하면, 이 부분을 《금광명경(金光明經)》이라고 하는 경에서는 삼신으로 잘 구분해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금광명경》에서는 부처님을 말씀하실 때 이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이 계십니다.
이것은 바로 진리 그 자체로서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부처님이 바로 법신불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무한공덕에 의해서 나타나는 부처님으로서 보신불(報身佛)이 있습니다.
보답할 보, 몸 신 자, 보신불은 공덕의 보답에 의한 부처님이십니다.
이것은 영원한 능력으로서의 부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변화할 화, 몸 신 자, 화신불(化身佛)의 부처님이 계십니다.
이 화신불은 끝없는 자비, 무궁한 자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부처님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부처님, 영원한 능력으로서의 부처님, 무궁한 자비로서의 부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끝없이 끝없이 이세상 어디에나 계시면서 항상 중생을 보살피고 항상 중생을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에 대한 의미가 대승불교에 와서 적극적으로 신앙되고 적극적으로 신봉함을 생활화하게 되었습니다.
- 부처님은 온 우주에 항상 계신다 -
그 예를 든다면, 소승불교 시대에도 육방에 대한 신앙이 있어서 유방에 예배를 드리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육방의 내용에 대해서는 《육방예경(六方禮經)》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말하면,
(1) 동방은 부모의 방소
(2) 남방은 스승의 방소
(3) 서방은 부부의 방소
(4)북방은 친척의 방소
(5) 상방은 종교지도자들, 스님들의 방소
(6) 하방(下方)은 하인들의 방소
라고 하신 바가 있습니다.
이 방위에 대한 관념은 지역과 민족에 따라서 다릅니다.
서양에서는 상방을 특별히 좋은 방소로 보고, 하방이나 사방(四方)은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도나 중국에서는 상방 뿐 아니라 동서남북과 지하까지 전체의 방위에 다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고 아낀다는 정신입니다.
때문에 부처님이 계신 곳도 어느 한 방소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을 포함해서 상방 하방까지 모든 곳에 부처님은 생명으로 계시고 자비로 계시고 능력으로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하나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늘 봉독 하고 신앙으로 실천해 가고 있는 《아미타경》을 보면, 육방에 다 부처님이 계신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서남북 사방과 상하에 어떤 어떤 부처님께서 계신다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사방과 상방에만 계신것이 아니라 하방에 까지 계십니다.
부처님은 어디에나 다 진리로 계시고 신통으로 계시고 불가사의하게 계십니다.
《삼국유사(三國遺史)》에서는 사복(蛇福)이란 사람에 대해 말하는 항목 중에 재미있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복은 태어나자마자 일어나지를 못하고 계속 누워 있기만 했기 때문에 뱀과 같이 있었다고 하여 뱀 사, 아이 동 자 사동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12년이 지나고서 사복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가게 되었습니다.
사복은 원효(617~686) 대사를 모셔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원효대사와 사복은 영구를 모시고 어느 산기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에 사복은 땅을 파지 않고 띠풀 하나를 뽑으니까 거기에는 큰 문이 열리고 그 밑에는 휘황찬란한 별천지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 때 사복은 어머니 시신(屍身)을 업고 그대로 하방세계로 들어가면서 장례가 모두 끝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복이 지하로 들어가기전에 남긴 게송으로 다음과 같은 송이 있습니다.
왕석석가모니불(王昔釋迦牟尼佛)
사라수간입열반(娑羅樹間入涅槃)
우금역유여피자(于今亦有如彼者)
욕입연하장계관(欲入連華臟界寬)
옛적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구시라성 사라쌍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시었어라.
지금도 그와 같이 할 사람이 있으니,
연화장 좋은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노라.
《삼국유사》의 이러한 이야기는 동양의 우주관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내용입니다.
동양에서는 어떤 방소이고 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부처님은 동서남북 상하 어떤 방향에도 다 계신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화경》 종지용출품에서는 많은 부처님이 지하에서 출현하시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세상은 그대로 천지 동서남북 할 것 없이 모두가 부처님의 세상입니다.
부처님은 어느곳을 막론하고 진리의 본신으로서, 진리의 생명으로서 그대로 계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교의가 《화엄경》이나 《법화경》에 와서 그 육방에다 사방을 더 포함하여 시방(十方)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시방이란, 동서남북 사방에 사이사이 간방이 일어났는데, 그 간방은 동남간 서남간 동북간 서북간입니다. 이 간방이 확정되면서 사방이 팔방이 되고 팔방에다 상방, 하방 합하면 시방입니다.
불교에서는 십방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시방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음력으로 10월을 십월이라고 하지 않고 시월이라고 발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이 사방에 항상 계신다고 해서 '상주(常住)'라고 합니다. 항상 상, 머무를 주, 이것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능력, 무궁한 자비로서 이 시방 온 우주에 항상 계십니다.
이러한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그대로 상주이십니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할 때 이 시방에 항상 계신 부처님께 늘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께 매우 중요한 예불을 올리는데, 대략 대웅전에나 큰 행사가 있을 때 부처님께 올려지는 염불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예경문(禮敬文)이 있습니다.
지심정례공양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리고 공양올립니다]
상주법계 진언궁중 반야해
암밤남 함카대교주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아바라 하카 법계주 원만보신 노사나불 아라바좌나 사바일대교주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과거상존 현재사위 칠여래불
동방만월세계 십이상원 약사유리광여래불
서방정토 극락세계 사십팔대원 아미타불
남방환희세계 보승여래불
북방무우세계 부동존여래불
중방화장세계 십신무외 비로자나불
당래용화교주 자씨미륵존불
참제업장십이존불
지장원찬이십삼존제위여래불
금륜보개 치성광여래불
ㅡㅡ 칠성여래불
찬탄미타 시방여래불
소멸중죄 삼십오불
삼천불 ㅡㅡ
미래세 삼천제불 ㅡㅡ
시방삼세 제망중중 부진해회 상주일체 불타야중
이와같이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할 때 이러한 예경문은 시방에 항상 계시는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신앙의식입니다.
이것은 모두 부처님이 시방에 진리의 생명으로 항상 계시면서 중생을 그대로 보살핀다고 하는 것을 신앙화한 하신 것입니다.
《천수경(千手經)》도 보면,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
을 일상의례의 상용의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불교에서는 시방에 항상 계신 부처님을 신앙하는 것이 그 기본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시방에 다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는 것을 믿기는 하나, 남방에 있는 환희세계라든지 동방의 만월세계라든지 북방의 무우세계라든지 이런 데보다도 서방 극락세계를 좋아합니다.
서방에는 극락세계가 있고 거기에는 아미타불이 계시기 때문에 서방극락세계 아미타불을 다 발원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모두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발원해서 염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방을 신앙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님이 계신 것은 서방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동서남북 어디에나 할 것 없이 항상 부처님이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처님을 가까이 뵙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업장이 많고 전생에서부터 지은 죄업이 장애가 되어 지혜의 눈이 어둡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실제에 있어서 부처님이 우리를 떠나서 멀리 계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부처님 속에서 부처님을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유마경》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각이 자유롭지 못한 시각장애자자로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태양 속에 있으면서 태양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은 부처님 속에 있으면서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중도적 실천, 자비의 실천으로 공덕을 쌓아가고 지혜를 닦아가다 보면 항상 부처님을 뵈올 수 있고 늘 부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부처님을 섬기는 데는 무엇보다도 결정심(決定心)을 가지고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결정심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한마음으로 결정해서 부처님을 신봉하고 모신다면 그 한마음의 결정적 신봉에 따라서 바로 거기에 알맞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참으로 중요한 부처님에 대한 신봉 정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방위에 관한 관념이 중요해서 이사를 갈 때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은지를 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길흉화복이나 오행 상생상극으로는 가능할 지 모르나 본래 부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동서남북 상하 내지는 간방까지 합해서 온 시방 우주가 모두 부처님 나라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신봉하는 우리 불자들은 어느 방소로 가던지 항상 부처님이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시방에 부처님이 상주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그런 것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세속적으로는 혹시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하여 조심 하는 것인데, 불교적으로는 어디에나 부처님의 불국토가 상주한다는 것을 믿고 부처님을 본신이 늘 존재한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다만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어떻게 좋은 일을 해 나가며 어떻게 불교의 자비 정신을 실천하며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힘을 어떻게 순수하고 확실하게 활발하게 실천해나가느냐 하는 것을 중요시 여길지언정 그외 부처님에 대해서나 불교적인 것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을 일체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서 늘 부처님을 신앙하고 자비이념을 실천해 나갈 때 참다운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신앙을 통해 얻는 최대의 행복입니다.
지금까지 부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디에 어떻게 계신가 하는 내용을 원시불교부터 모두 개괄적 과정을 거쳐 가며 말씀드렸습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趺感未不周)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부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시어
모든 중생 앞에 나타나 계시도다.
인연에 따라 감응하지 않는 곳이 없으시니
항상 본래의 자리에 계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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