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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 Buddhsim, 부처님 말씀/불교를 알기 쉽게

불교의 기본 교의와 수행

by Yeon Ha Cheon 2025. 2. 9.

 

- 불교는 유신론(有神論)인가 무신론(無神論)인가 -

불교는 어떠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며칠 전에 어느 분이 저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불교는 유신론입니까, 무신론입니까?”

저는 여기에, “불교는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 인도의 유신론과 무신론 -

불교는 유신론도 아니고, 무신론도 아닙니다.

이 문제는 비단 오늘날뿐만 아니라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던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미 천지만물(天地萬物)을 모두 신격화해서 보는 유신론이 있었습니다.

풀에는 풀대로 신이 있고, 나무에는 나무대로 신이 있고, 돌에는 돌대로 신이 있어서 모든 것이 하나하나에 신이 다 들어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 신들 중에도 왕이 있고 부하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으며, 그 왕 중에서 태양신이 최고로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태양 숭배의 종교 풍속도 있었습니다.

태양신보다도 더 높은 지배신으로 제석천왕의 신을 믿었고, 또 창조신으로 대범천왕의 신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에 브라흐만 신을 천지만물의 근본이 되는 신으로 믿었습니다.

이러한 유신론 외에 신이 없다는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유물론도 발달하였습니다.
천지만물을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4(四大)로 구성이 되었다는 학설입니다.
즉 지수화풍(地水火風), 땅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구성이 되어서 물질 뿐이라고 보는 사상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허공을 합하는가 하면 그 외의 것을 합해서 5, 6대설의 학설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처님 당신에 이미 유신론, 무신론이라고 하는 학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불교는 유신론의 입장도 택하지 않고 무신론의 입장도 택하지 않고 부처님의 독자적인 입장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 서양의 창조론과 진화론 -

이밖에 잠시 세계적으로 살펴본다면, 서양에서는 우주의 근본을 창조론으로 보는 경우가 있고 또 진화론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일찍이 창조론과 진화론이 발생하였습니다.

 

- 중국의 생성론 -

중국에서는 유교와 도교에서 생성론이라고 하는 것이 발달하였습니다.
날 생() , 이룰 성() 자의 생성론입니다.

유교에 있어서는 음양오행이 서로 상생을 하고 상극을 해서 천지만물이 순환하고 운행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도교에서는 이 천지에 절대적으로 자연스러운 무궁무진한 도()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이 도에서 하나[태극]가 나오고 하나에서 둘이[음양]이 나오고 둘에서 셋[삼재]이 나오고 셋에서 천지만물이 나온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이렇게 보는 것이 도교의 생성론입니다.
이것을 통칭해서 중국에서 발생한 생성론이라고 합니다.

 

- 인도의 범아일여(梵我一如) -

인도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유신론과 무신론이 있는데, 유신론적인 입장에서는 전체 근본신 브라흐만과 개체로 존재하는라는 아트만(ātman)을 인정하고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전체와 아트만이라고 하는 개체는 일여(一如)의 관계라 합니다.

범아일여론으로 전체는 개체를 떠나지 아니하고 개체는 전체를 떠나지 아니하면서 아트만과 브라흐만은 일여, 즉 불이(不異)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유신론의 입장이나 무신론의 입장은 불타 이전에 이미 있었지만 불교는 이 중에서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가 어떠한 원리를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 불교는 연기론(緣起論)이다 -

불교의 입장을 단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불교는 연기론이요중도론(中道論)입니다.
불교에 있어서 연기와 중도는 불교의 모든 것입니다.
연기는 불교의 원리를 설명한 부분이고 중도는 불교의 실천을 설명한 부분입니다.
이 연기의 진리에 의한 중도적 실천이야 말로 불교에 있어서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는 바로 연기의 진리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또 평생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은 바로 중도의 실천을 평생 동안에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팔만대장경 어느 곳을 막론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개되는 내용입니다.

소승불교 경전이나 대승불교 경전을 총망라해서 보더라도 연기의 내용과 중도의 내용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논리적 전개의 형태와 여러 가지 조직적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내용에 있어서는 연기와 중도를 떠나서는 불교는 그 입장이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예를 본다면 중아함경 제7권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바로 연기를 본 것이다. [若見緣起 便見法 若見法 便見緣起]”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바로 연기법을 의미합니다.

이 연기법에 있어서는 또 다른 부분에서 여러 차례 걸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잡아함경 제12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연기법(緣起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지 안 하든지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해서 중생을 위해 분별 연설하여 깨우치나니라.”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연기의 내용을 어떻게 부처님은 말씀하시고 계신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 연기의 의미와 내용 -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연기법이라고 한다면, 그 연기법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바로 이렇게 나옵니다.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연기를 설명한 중요한 골자입니다.
한문으로는 차유고(此有故)로 피유(彼有)하고 차기고(此起故)로 피기(彼起). 연기는 하나로 독생(獨生)을 해서 독존(獨存)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엇과 서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의존하여 발생해서 공존하다가 사라질 때도 다른 것에 의존해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연기입니다.

연기라고 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어울려서 일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일어나는 것도 서로 어울려서 일어나는 동시에 사라지는 것도 서로 어울려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것이 있음으로써 있을 수 있고, 저것은 이것이 있음으로써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저것이 없어지면 이것도 없어진다는 것이 바로 연기의 기본 골격입니다.
이 연기는 후대에 와서 인연(因緣)이라는 말로도 쓰이고 인과(因果)라는 말로도 혼용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불교에서는 연기, 인연, 인과 이것이 진리의 기본입니다.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서로 말미암아서, 서로 어울려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며인과라는 것은 시간적인 입장에서 관찰한 것으로서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는 바로 원인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고, 또 결과를 떠나서 원인을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인과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연기론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정신이라고 하더라도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연을 떠나서는 어떠한 존재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만물은 모두 이것저것이 서로 어우러진 인연의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천지만물이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하는 뜻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입니다.
현재가 있는 것은 현재가 있을 수 있는 과거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고, 그 과거는 또 그 과거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고, 또 그 과거는 그 과거에 의해서 일어나서, 이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로 따져 봐도 과거가 끝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현재는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그 미래는 또 그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내서 미래로 따져 봐도 연기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과거를 추적해 봐도 과거가 끝이 없고, 미래를 추적해 봐도 미래가 끝이 없습니다.
이 인연의 연기법칙으로 볼 때 우주 현상은 사실에 있어서 시작도 없는 것이요, 끝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합니다.
바로 시작도 끝도 초월한 것이 무시무종입니다.

그렇다면 무시무종에 있어서 무엇만이 존재하는 것이냐 할 때, 바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삼생연기(三生緣起)입니다.
과거
현재미래의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에 의한 삼생 인연으로 계속해서 이 끝없는 연기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연기론입니다.

있는 현상이나 없는 현상은 없는 대로 무슨 실체가 있고, 있는 대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모이면 있을 수도 있고, 인연이 흩어지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있고 없는 것은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건 부질없는 것이요, 덧없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무상(無常)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부질없다는 것입니다.
왜 부질없는 것이냐? 모든 현상은 전부가 인연에 의해서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서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인연의 현상은 무상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있는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없는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있고 없는 것은 인연에 따라서 항상 가변적이기 때문에 있는 것만을 실상으로 볼 수도 없고, 없는 것만을 실상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기에 있어서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모두 초월해서 자유자재하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불교는 흔히 유()와 무()를 초월한다고 합니다.
불교는 유신론이라 해도 연기법에서 어긋나는 것이요, 무신론이라고 해도 연기법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불교는 유신론도 아니고 무신론도 아닙니다. 바로 연기론이요, 중도론입니다.

 

- 불교의 우주관인 삼법인(三法印) -

불교의 기본 교의로는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가 제일 중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삼법인이나 사성제는 그대로 불교의 연기론과 중도론을 설명한 것입니다.

특히 이 삼법인은 불교에 있어서 우주관이며, 사성제는 인생관에 해당합니다.

삼법인은 바로 불교의 우주관으로서, 연기법을 잘 설명한 말입니다.
여기에 도장 인()자를 부친 것은틀림없는 진리다, 확실한 표시가 된다는 의미로서 대외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삼법인의 내용을 보면 첫째, 우주 세계 만상의 진리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 해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듭니다.
제행은 모든 돌아가는 현상은 덧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모든 현상은 하나하나에 어떤 실질적인 물체가 있고 실질적인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 의해서 생겼다가 어떠한 환경에 의해서 사라지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하나에는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론입니다.

불교는 무상이라고 하는 무상론과 무아라고 하는 무아론이 있는 반면에 그 근본 진리는 항상 유와 무를 초월해서 늘 고요하고 실상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셋째의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입니다.

삼법인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인인데 불교의 인연법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상과 무아, 적정은 그대로 인연의 원리입니다.

이 삼법인은 한마디로 연기를 뜻합니다.
이 연기는 바로 무상론이고 무아론인데 왜 현상이 덧없이 쉽게 바뀌어지고 변하느냐 하면, 물은 물대로 영원히 물이 아니라 물이 될 수 있는 인연이 모이면 물이 되었다가 물이 없어질 수 있는 인연이 조성되면 없어지기 때문에 물의 모습 그 자체는 실로 무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아론은 왜 무아론인가 하면, 하나의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살펴보더라도 자동차 그 자체가 자동차가 될 만한 어떤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동차가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속품과 거기에 기술과 또 휘발유라든지 기타 운전기사가 있어서 그 가운데 하나의 역할로 모여지면 자동차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거니와 그런 하나하나 부품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거기에 여러 가지 부품과 기름 같은 것이 들어 있지 않고 운전을 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건 이미 자동차가 아닌 것입니다.

사실상 자동차로서의 실질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무아론입니다.
그러나 그 연기법은 어떤 현상이 나타나든지 안 나타나든지 간에 항상 연기의 진리는 그대로의 진리입니다

그것은 유와 무를 초월하고 무상과 무아를 초월해서 항상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열반적정이라고 합니다.이것이 불교의 우주관, 세계관으로서 불교의 연기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 불교의 인생관인 사성제 -

사성제(四聖諦)는 불교의 인생관이며 생활관입니다.
사성제의 첫째는 인간에게는 괴로움이 따른다는 고성제(苦聖諦)입니다.
고성제는 바로 인도의 전체적 인생관이기도 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범어로 두흐카(duhka)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불안과 짜증과 분노와 기타 좌절, 절망, 고독 등도 고()에 해당하는 것이요, 육체적으로 여러 가지 고통도 전부 이 고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공식화해서 인간에게는 살아가는 고통, 늙어가는 고통, 병듦에 대한 고통, 죽음에 대한 고통 등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이야기했는가 하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 또 보기 싫은 사람과 만나는 고통[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정신과 육체가 치성한 데 대한 고통[五陰盛苦]을 이야기해서 사고(四苦), 팔고(八苦)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인간의 괴로움을 고성제하고 합니다.
그러면 이 괴로움은 어디서부터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번뇌론입니다. 괴로움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반드시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 원인이란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번뇌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공연한 헛된 번뇌와 망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첫째로 인간에게 있는 허욕과 망상에 있어서 지적해야 할 것은 탐욕을 들 수가 있고, 그 다음에는 분노를 들 수가 있고, 그 다음으로 무지(無智)를 들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탐욕과 분노와 무지, 이것을 불교에서는 세 가지 독이라 해서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주체가 되어서 끝없는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그 번뇌 망상이 원인이 되어 인간에게 한없는 고통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바로 집성제(集聖諦)입니다.

이것이 보통 일반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괴로움과 그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그 다음에는 멸성제(滅聖諦)로서 번뇌와 고통이 모두 없어진 해탈의 세계, 이상의 세계, 열반의 세계를 하는 것입니다.
이 멸성제란 온갖 번뇌와 고통을 초월한 경지로서 여기엔 오로지 영원의 세계, 자유의 세계, 기쁨의 세계, 자연스러운 청정 세계가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해탈의 세계란, 영원한 생명, 완전한 최고의 환희의 세계를 해탈의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운동과 어떠한 실천 행위가 따라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는 실천론으로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도성제(道聖諦)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수도론이고 실천론입니다.

도성제은 인간은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중도적 실천을 통해서 그 열반 해탈의 세계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중도 실천의 팔정도 -

이것을 항목별로 자세히 이야기한 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이 팔정도는 불교의 기초를 이룬 것인 동시에 실천의 기본 덕목으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팔정도의 항목을 살펴보면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입니다.

()은 바로 중()과 같은 뜻입니다.
중은 고통과 향락에 치우치지 않고 불고불락의 심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보고 생각하고 말하며 직업에 종사하며 생활에 종사하는 등을 모두 불고불락의 중도라 하는 것입니다.
팔정도는 팔중도와 같은 뜻입니다
이 팔정도는 불교에 있어서 불고불락의 중도적 실천을 뜻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며, 불교의 바로 중도행이고 실천론이고, 수도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 팔정도에 대한 문제는 글자 그대로 불고불락의 중도수행으로서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부처님께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예를 하나 든다면 부처님 제자 중에 한 제자가 있었는데, 부처님에게 출가를 해서 공부를 하던 중에 그 공부의 진척이 잘 이루어지지 않자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제자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거문고 줄을 고르는 것과 같다.”

거문고 줄을 너무 팽팽하게 매도 소리가 나지 아니하고 너무 느슨하게 매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 거문고 소리가 잘 날 수 있도록 잘 조절된 상태가 바로 중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행복을 위해서 어떤 운동을 하고 실천을 하고 노력을 할 때 너무 방탕한 생활을 해도, 너무 긴장된 생활을 해도 그 행복은 오지 않는 것입니다.
방탕하지도 않고 긴장하지도 않아서 거문고의 소리가 잘 날 수 있도록 조정된 상태와 같이 노력을 할 때 거기에 바로 행복이 오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중도의 수행입니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에서 성불을 하시고 녹야원에 가서 최초로 다섯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실 적에 선언하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그 두 가지 길이란 하나는 고행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향락의 길이다.”

인간은 고행과 향락에 떨어지기가 쉽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육체를 지나치게 자학하고 학대해서 공연한 고통에 스스로 빠져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사치하고 방종하고 타락하여 향락의 구렁텅이에 빠져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 진리의 길이 아닙니다.

 

- 중도 실천의 계정혜(戒定慧) -

진리의 길은 고행과 향락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그야말로 중도적 실천, 중도적 수도가 바로 진리의 길입니다.

이 중도의 수행은 불교에서 흔히 계정혜 삼학(三學)으로 구분을 합니다.
계정혜는 꼭 배워야 할 내용이라고 해서 삼학이라고 하며, 글자 그대로 중도의 실천 방법이며, 실천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팔정도라고 하는 덕목도 모두가 계정혜 삼학으로 통일이 됩니다

예부터 팔정도를 계정혜 삼학으로 구분할 때 정견, 정사는 지혜에 해당하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은 계에 해당하고, 정념, 정정은 정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계정혜는 팔정도요, 팔정도는 바로 중도입니다.
고통과 향락에 떨어지지 않는 중도가 계정혜로 실천이 되며 계정혜는 바로 팔정도로 세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불교의 실천 방법이 됩니다.

이 부분을 다른 경에서도 매우 자세히 이야기 했습니다.
확실히 불교는 불
승 삼보로 조직이 되었으며 계정혜 삼학으로 실천이 됩니다.

삼보와 삼학은 불교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계정혜 삼학을 설명한 한 경전의 예를 든다면 장아함경 제4권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년이십구 我年二十九

출가구선도 出家求善道

수발아성불 須跋我成佛

금이오십년 今已五十年

계정지혜행 戒定智慧行

독처이사유 獨處而思惟

금설법지요 今說法之要

차외무사문 此外無沙門

 

내 나이 29세에

출가하여 해탈의 도를 구했노라.

수발아, 내가 해탈한 지

지금 벌써 오십 년이 되었다.

그중에 계정지혜의 실행을

내가 홀로 늘 생각하였노라.

지금 설법의 요점도 바로 그것이다.

이 외에 수도자는 있을 수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도 부처님께서 하신 설법의 기본과 실천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팔정도이며 계정혜 삼학이하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팔정도와 계정혜 삼학은 바로 고통과 향락에 떨어지지 않는 중도의 실천입니다.
이 중도의 실천이 바로 불교 수행방법입니다.
이 부분에 다른 것은 다 생략하고 제일 앞에 나오는 계의 부분을 조금 더 부연해서 말씀드린다면 불교에 있어서는 행동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행동의 실천을 어떻게 조종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것을 바로 계라고 하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이 불교의 계는 가장 기초적인 계로서 오계(五戒)를 들 수 있습니다.
오계는 부처님 제자라면 누구나 다 지켜야 하는 기본 계율입니다.

 

- 불교도의 기본 오계 -

그것은 첫째불살생(不殺生)으로서, 어떤 생명체에 폭력과 압박과 살생을 초래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불투도(不偸盜)로서, 다른 사람이 주지 아니 하는 물질을 알게 모르게 착취한다든지 빼앗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불사음(不邪淫)으로서, 남녀 관계를 정정당당하고 떳떳하게 갖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넷째불망어(不妄語)로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망어가 있고, 소망어가 있어서 용서받지 못할 거짓말이 있는 동시에 용서받을 수 있는 거짓말도 있습니다.
그 한 예를 든다면 부처님 제자로서 해탈을 하지 못한 사람이 해탈을 했다고 하는 경우는 완전히 대망어로서 용서받지 못할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좋은 일을 도모하고자 했을 경우에는 소망어로서 용서받을 수 있는 거짓말입니다.

이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는 불교에서 기본 계율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계명인 것입니다.

여기에 불음주(不飮酒)를 하나 포함해서 술 마시는 것을 삼가라고 한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계는 아니고 불자라면 이것을 잘 배우고 익혀서 술로 말미암아 실수가 범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술을 통해서 앞의 네 가지 계명까지 침범당하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 바로 불음주입니다.

이 오계는 부처님 제자라면 승속을 막론하고 어떤 제자든지 다 지켜야 하고 간직해야 하는 계입니다.

그 외에도 신분과 연령에 따라서 달라지는 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출가하는 스님들로서 어린 스님이 지키는 사미십계가 있는가 하면 나이 많은 분들, 성인들이 지키는 구족계가 있고, 더 나아가서는 신남신녀와 비구, 비구니, 모든 사부대중이 통틀어서 지키는 보살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세목이 있고 여러 형태의 계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다 어떤 까다롭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연과 인간과 우주 전체와 화합을 도모하는 진리이고 공존과 공영을 도모하는 진리입니다.

 

- 계정혜 삼학의 근본정신 -

()는 다른 것이 아니라 화합과 공존 공영을 위해서 우리가 첫째로 행동면을 화합적으로 하고 자비로운 방향으로 해나가자고 하는 것으로 계의 근본정신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에 와서는 제악막작(諸惡莫昨)이라고 해서 모든 악을 우리로부터 하나하나 추방해 나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어떤 세목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악한 일을 하나하나 멀리하고 악한 일을 하나하나 자기로부터 규제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정()은 항상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기 마음을 정화해 나가는 것, 자기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정기심(自淨其心)이라고 합니다.

지혜하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실천해 나가는 창조적 생활을 뜻합니다.
이것은 
중선봉행(衆善奉行)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육조단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계정혜를 해석할 때 계는 제악막작으로서 모든 악을 멀리하는 것이요, 정은 자정기심으로서 자기의 마음을 닦아가는 것이요, 혜는 중선봉행으로서 모든 좋은 일, 창조적인 일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다 탐욕이 있고 무지가 있기 때문에 이 탐욕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제악을 막작하는, 악을 짓지 아니하는 계가 필요하고,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자기 마음을 정화해 가는 정이 필요하며, 무지적 전도된 생활을 하는 그러한 무지의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혜로써 창조적인 선행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 중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중도가 개인화되지 아니하고 사회화하고 대중화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원시불교나 소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계정혜 삼학, 팔정도, 중도가 개인화되었기 때문에 수도가 강조가 되었고,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중도가 사회화하고 대중화하고 국가화했기 때문에 자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중도가 사회화하면 자비가 되고 개인화하면 수도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수도를 잘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한 번 방향을 바꾸어서 사회화할 때 강력한 자비의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육바라밀 -

강력한 자비의 실천은 바로 중도의 사회화를 뜻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여기에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 하는 관계로 체계화되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팔정도가 자비로서 사회적으로 재조직된 것입니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 베푸는 것

지계(持戒), 계율을 잘 실천하는 것

인욕(忍辱), 욕됨을 잘 참는 것

정진(精進), 항상 노력하는 것

선정(禪定),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

지혜(智慧), 좋은 일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육바라밀의 항목입니다.
이것이 다 계정혜 삼학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 중에서 지계와 인욕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계에 해당하고, 정진과 선정 이것은 바로 정에 해당하고, 보시와 지혜는 혜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중도가 사회화한 것으로서, 자비의 실천을 뜻합니다.

이렇게 모두가 다 중도, 계정혜 삼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불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막론하고 삼법인, 사성제, 육바라밀, 이것이 기본이 됩니다.

삼범인, 사성제, 육바라밀을 떠나서는 불교의 기본 원리와 실천 방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은 사성제가 있고, 육바라밀이 있으나 사실은 같은 것입니다.
중도가 사회화하는 광정으로 조직되었을 때 육바라밀이 되고, 중도가 개인적으로 실천되는 방향으로 조직되었을 때 사성제나 팔정도가 됩니다만 그 내용에 있어서 모두가 자비나 수도나 중도적 실천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실천론에 있어서는 중도론이요, 원리론에 있어서는 삼법인으로서 연기론입니다.

 

- 불교에서 연기론의 발달 -

이리하여 불교는 모두가 연기론에 의한 중도의 실천뿐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교리의 발달사적으로 생각을 해본다면 이 기본적인 연기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로 교리가 조직되고 발달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떻게 생로병사라는 고통에까지 왔느냐 하는 것을 밝힌 12가지 연기를 비롯해서 아뢰야식(阿賴耶識)연기라든지 진여(眞如)연기다든지 법계(法界)연기라든지 육대(六大)연기라든지 불계(佛界)연기라든지 이러한 많은 유형의 연기가 조직되고 또 교리로서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상세히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 중요한 것은 불교는 어디까지나 기본 원리가 연기론이라는 것입니다. 
이 연기를 떠나서 불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천 원리에 있어서는 중도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적 실천을 떠나서는 수도와 자비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이렇게 때문에 불교에 있어서 중도론과 연기론은 그 실천론과 원리론으로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면 그것으로 족하겠습니다.
이것을 여러 가지로 부연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앞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고, 우선 알아야 할 것은 모두가 연기론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선에서 마음의 문제를 굉장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유심(唯心)연기라고 합니다. 오직 마음에 의한 연기라 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을 착하게 일으키면 착한 결과가 금방 나타나고, 한 마음을 악하게 일으키면 악한 결과가 금방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유심연기입니다.
한 마음이 깨끗하면 온 우주가 깨끗하고 한 마음이 어두워지면 바로 온 우주가 어두워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심연기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 연기론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구체화되고 복잡화해서 한 마음을 일으키는 그 순간에 이미 결과가 그 가운데 이루어졌다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을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이라고 합니다
원인 속에 이미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하나 살 때 돈을 주게 되면 돈을 내주는 그 즉시에 물건을 돌려받습니다.
여기서 볼 때 상품을 사기 위해서 물건 값을 치르는 것은 원인이 되고 상품을 돌려받는 것은 결과가 됩니다.
이것은 '
인과의 동시성'을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결과는 원인을 떠나지 않고 원인은 결과를 떠나지 않는다고 해서 인과의 동시성을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화엄경이라고 하는 경에서 특히 이 부분을 많이 말했습니다.

대승불교의 연기론은 바로 원융론(圓融論)으로 돌아갑니다.
원융론은 인과의 동시성을 의미합니다.
조그마한 결과 속에 큰 결과가 포함되어 있고, 큰 결과 속에 조그마한 원인이 포함되어 있어서 원인은 결과를 떠나지 아니하고 결과는 원인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처님의 지혜만큼 위신력이 있는 것이 없고, 부처님의 자비만큼 세상을 뒤엎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의 능력과 자비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과거, 전생에서부터 많은 자비의 실천을 닦았고, 지혜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오늘날 그와 같은 부처님의 위신력과 자비력을 성취한 것이지, 과거에서부터 어떠한 노력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결과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부처님의 위신력과 덕상을 볼 때 그것은 이미 과거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미래의 결과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 이 순간에 어떠한 노력을 하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 순간에 좋은 일을 할 경우에는 결과는 저저로 좋아지는 것이고, 이 순간에 좋지 못한 일을 할 경우에는 결과는 저절로 좋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다른 제삼자에게 무엇을 구걸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 내가 어떠한 마음을 일으키고 어떠한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마음과 행위 속에 이미 결과는 저저로 정해집니다.

그 행위를 떠나서 어떤 결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의 동시성이요, 인과상통으로서 인과원융론이 되는 것입니다.

이 원융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 그 자체가 결과이지 그 시작을 떠나서 엉뚱한 결과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다양한 인과론, 인연론, 연기론입니다.
이것을 너무 급하게도 하지 아니하고, 너무 느리게도 하지 않아서 항상 중도의 실천으로 걸어가는 것이 바로 중도론입니다.

불교의 기본 교리를 언급할 적에는 복잡하고 조금 난해한 점이 있는 것 같아서 여러 사람들이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주 쉽게 생각해서 불교의 팔만대장경의 말씀이 있습니다만 핵심만을 파악할 때 그것은연기론과 중도론이다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 중에 
연기를 설명한 부분은 삼법인이고, 중도를 설명한 부분은 팔정도와 육바라밀이라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연기라고 하는 것은 매우 다양한 면을 나타내서 여러 가지 유형이 나왔으나 그것은 다 원인에 의한 결과, 이것에 의한 결과로서 원인만 잘 만들어 가면 결과는 저절로 있다. 결과를 보면 원인은 알 수 있고, 원인을 보면 결과는 저절로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연기론입니다.

 

- 한국인의 불교적인 언어와 사고 -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 동안 불교가 봉행되어 왔기 때문에 언어나 행동, 사고 속에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본다면 우리말 속에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야단법석은 처음 원래의 뜻과는 조금 잘못되어져서 많이 시끄럽고 질서가 없고 뒤범벅이 된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원래의 뜻은 신라시대에 산중에서 도를 닦고 들판에 어쩌다가 자나가시는 큰스님들, 훌륭한 스님들을 만나면 거기서 일하는 농부들이 그 스님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고 또 길가는 스님을 어떤 절에서 모실 수가 없어서 그 들판에다가 임시로 단상을 차리고 법회의 자리를 마련해서 법회를 보았다고 해서 야단법석입니다.
이것은 우리말 속에 불교의 역사가 그대로 숨어 있는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은 일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어느 처녀가 길을 지나가는데 어떤 낯모르는 총각이 맞은편에서 오면서 팔을 너무 휘둘러서 처녀의 핸드백이 저만큼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 처녀는 화가 나서 그 총각과 대판 싸움을 벌였었는데, 얼마 후에 서로 맞선을 보게 되어 어느 다방에서 다시 만난 것입니다.
이때 두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며칠 전에 길거리에서 한참 싸움을 하고 다시 만난 것은 필경코 전생부터 우리 두 사람은 많은 인연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서로서로 별로 알아볼 것도 없이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인간이 서로 만나는 것은 전생에 의해서 만나고 우리가 앞으로의 내세의 인연을 다시 만든다고 하는 이런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역사 속에는 언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불교와 유사성을 가진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상과 같이 불교의 기본 교의와 그 실천 수행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언급을 한다면 불교는 그대로 연기론이요, 중도론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심불망취과거법 心不妄取過去법

역불탐착미래사 亦不貪着未來事

불어현재유소주 不於現在有所住

요달삼세실공적 了達三世悉空寂

 

공연히 지난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앞으로의 일에 과욕을 부리지 않으며

현재의 일에 헛된 집착이 없으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평등함을 깨달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