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日所薦 금일소천
某靈靈駕 모령영가
至心諦聽 지심제청
至心諦受 지심제수
生是何物 생시하물
死是何物 사시하물
生亦不得 생역부득
死亦不得 사역부득
生死本空處 생사본공처
天地猶分明 천지유분명
今日所薦 금일소천
某靈靈駕 모령영가
放下又放下 방하우방하
自在又自在 자재우자재
오늘의 모령 영가께서는
지극한 마음으로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으시오.
태어남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일까.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본래 없는 곳에
하늘과 땅이 뚜렷합니다.
오늘의 모령 영가께서는
태연히 하고 태연히 하여
자유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시오.
영가 법문은 본래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영가 법문은 간단한 것입니다.
법사(法師)가 자리에서 부터 일어나서 한 결음 두 걸음 세 걸음으로 법상(法床)에 올라와 턱 앉아서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척 보이고, 또 주장자를 법상에 내리쳐서 한번 소리를 내는 가운데에 영가 법문이 다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모든 법문이 구족히 이루어졌습니다.
이 가운데 삼세제불(三世諸佛)이 해탈 열반한 진리가 있고,
이 가운데에 역대조사(歷代祖師)가 見性成佛(견성성불)한 진리가 있고,
이 가운데에 일체보살(一切菩薩)이 천만덕행(千萬德行)을 닦는 진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영가께서 이고득락(離苦得樂)하는 진리가 이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 주장자를 들어서 소리를 한 번 척 내는 가운데에 확실하게 모습을 보고, 확실하게 소리를 듣는다면 즉시에 해탈을 하며 즉시에 이고득락을 하게 됩니다.
한가지 확실히 들으면 천 가지를 확실히 들을 수 있고, 한가지를 확실히 보면 천가지를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늘 보면서도 진실을 보지 못하고, 늘 들으면서도 진실을 듣지 못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영가는 바로 이 한순간을 맞이해서 하나를 분명하게 보고 분명하게 들을 때 모든 지난날의 업자을 일시에 소멸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서 왕생극락(往生極樂)과 이고득락이 일찰나에 이루어 집니다.
영가법문이란 본래 많은 말이 필요 없고 주장자를 한 번 들어서 탁 치는 순간에
다 끝나는 것입니다만, 여기서는 배우고자 하는 많은 분들과 학인들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사족(蛇足) 처럼 좀더 부연(부演)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한평생 살면서 많은 일을 경험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사는 것이 사람의 일생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 일입니다.
이것을 생사대사(生死大事)라 합니다. 태어나는 날은 생일날이요, 죽는 날은
제삿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일날 태어나서 제삿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생입니다.
여기에 넘기 어려운 선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인간은 죽음을 면할 수가 없다는 일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 보통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인간에게 세가지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출가 수도를 결심했습니다.
그 세 가지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노쇠와 질병과 사망을 누구도 원하는 사람이 없고 누구도
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일을 근본적으로 물리치기 위해서 도(道)를 닦으셨습니다.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에게 무슨 완전한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고 즐거움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고자 뜻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노병사의 문제를 완전히 초월하는 길이 있다면 그보다 더 값진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하시고 수도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온갖 세속적인 애정과 번민을 물리치고 출가하여 도를 닦으셨습니다.
그러한 노력에 의하여 결국은 해탈성불(解脫成佛)을 이루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사 해탈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물리치기 위해서 수도를 하셨는데, 나중에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를 닦았다면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전에는 수도를 중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완전히 해결했다면 부처님에게는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없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도 역시 늙음이 있었고 열반이 있었습니다.
처음 출가 수도의 목적과 마지막의 결과가 일치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생사해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언재까지나 수도를 계속 하셨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해탈을 이루시고 고행을 중지했습니다.
그리고 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에 [해탈과 죽음]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해탈하고 나서 인생과 우주를 보니까 [본래 생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무생사(本無生死)의 진리를 깨달으신 것입니다.
생사가 본래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해탈입니다.
불교에 있어서 불법(佛法)은 늙어가는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는 사람을 죽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본래 늙음이 없고 본래 죽음이 없는 그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 생사가 없는 진리를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 해탈입니다.
생사가 없는 진리를 마음대로 활용하는 것이 해탈입니다.
진리에는 생사가 없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생사가 본래 없는 진리를 중생에게 가르쳐 주는 일이 [자비] 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우리에게는 생사의 고통이 이렇게 분명한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꿈 속의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가 꿈입니다.
이것이 몽중생사(夢中生死)입니다.
꿈에서는 분명히 태어나고 죽는 일이 있으나 진리에는 본래 나고 죽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사의 꿈 속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 지구에는 어두운 밤이 있고 밝은 낮이 있지만, 태양에는 본래 밤과 낮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태양은 항상 밝아서 밤도 없고 낮도 없는데 지구에는 밤과 낮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가 분명히 있고 고통과 괴로움이 분명히 있지만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부처님에게는 생사가 없으십니다.
본무생사를 깨달으신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生本無生 생본무생
滅本無滅 멸본무멸
生滅本虛 생멸본허
實相常住 실상상주
진리에는 본래 태어남이 없고
진리에는 본래 죽음이 없도다
나고 죽음은 본래 허망한 것이며
진리의 실상은 영원하도다
이 게송(偈頌)은 시식(施食)하는데 많이 봉창되는 게송입니다.
시식하고 제사지내는 예식문을 보면 그 가운데에 불법의 진리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한없는 법문이 시식하고 천도하는 예경문(禮敬文)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진리에는 생사가 없으나 중생은 생사의 꿈을 계속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에 공연히 하루에도 수천 번씩 태어나고 수천 번씩 죽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생사가 없는 실사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인간의 괴로움은 부질없는 생사의 동작을 계속 반복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12연기 (十二緣起)
某靈靈駕 至心제受 모령영가 지심제수
汝從無始已來 至于今日 여종무시이래 지우금일
無明緣行 行緣識 무명연행 행연식
識緣名色 名色緣六入 식연명색 명색연육입
六入緣觸 觸緣受 육입연촉 촉연수
受緣愛 愛緣取 取緣有 수연애 애연취 취연유
有緣生 生緣老死 유연생 생연노사
憂悲苦惱 우비고뇌
無明滅則 行滅 무명멸즉 행멸
行滅則 識滅 행멸즉 식멸
名色滅則 六入滅 명색멸즉 육입멸
六入滅則 觸滅 육입멸즉 촉멸
觸滅則 受滅 촉멸즉 수멸
受滅則 愛滅 수멸즉 애멸
愛滅則 取滅 애멸즉 취멸
取滅則 有滅 취멸즉 유멸
有滅則 生滅 유멸즉 생멸
生滅則 老死 생멸즉 노사
憂悲苦惱滅 우비고뇌별
모령의 영가께서는 자세히 들으시오.
그대는 옛적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무명에 의해서 행이 있고,
행에 의해서 식이 있고,
식에 의해서 명색이 있고
명색에 의해서 육입이 있고
육입에 의해서 촉이 있고,
촉에 의해서 수가 있고,
수에 의해서 애가 있고
애에 의해서 취가 있고
취에 의해서 유가 있고
유에 의해서 생이 있고
생에 의해서 노사우비 고뇌가 있습니다.
무명이 없어지면 행이 없어지고
행이 없어지면 식이 없어지고
식이 없어지면 명색이 없어 지고
명색이 없어지면 육입이 없어지고
육입이 없어지면 촉이 없어지고
촉이 없어지면 수가 없어지고
수가 없어지면 애가 없어지고
애가 없어지면 취가 없어지고
취가 없어지면 유가 없어지고
유가 없어지면 생이 없어지고
생이 없어지면 노사우비 고뇌가 없어집니다.
(12연기에 대한 해석은 반야심경 강의를 참고하세요))
부처님께서 중생의 생사인연을 관찰하실 때 생사가 본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중생의 무영(無明)에 의해서 생로병사가 있음을 보신 것입니다.
무명에 의해서 생사가 있는 것이지 생사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무명연기(無明緣起)이며, 12연기 입니다.
무명이란, 법어의 아비디아(a- vidya)로서, 밝은 것이 없다, 지혜가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혹(迷惑)한 마음, 잘못 알고 있는 마음, 진리에 대한 착각(錯覺)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무명에 의해서 전도(顚倒)된 행위가 나오는데 이것을 업(業)이라고 합니다.
무명에 의한 업으로 말미암아 생노병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계별로 보면 12항목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12연기가 됩니다.
12연기를 해석할 때 몇가지 다른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무영에 의해서 행이 있고, 행에 의해서 식이 있고, 식에 의해서 명색이 있고.... 이며,
(2) 무명이 행을 일으키고 <緣>, 행이 식을 일으키고 <緣>, 식이 명색을 일으키고 <緣> ... 입니다.
전통적인 방법은 연 <緣> 을 일으킨다고 해석합니다.
이 두가지 해석 방법은 내용에 있어서는 마찬가지 입니다.
다시 말하면[무명에 의해서 행이 있다고 하는 말이나, 무명이 행을 일으킨다고 하는 말은 내용에 있어 서는 다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무명이 주체가 되어서 행<行> 이하 생로병사를 받는다고 하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3) 무명을 연하여 <緣>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緣> 식이 있고 ....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는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 해석에는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2연기의주체가 [무명] 이니까 무명 밑에는 주격 조사 <이>가 붙여지던가 아니면 존재격 조사 <에>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무명 밑에 목적격 조사 <을>을 붙일 경우에 무명 이외의 주체를 따로 인정할 위혐이 따릅니다.
쉽게 말하면 [...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12연기에서는 무명을 연할 수 있는 어떤 주체도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명 그 자체가 12 연기의 유일한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12 연기의 해석에 있어서는 알기 쉽게 [무명이 행을 일으킨다고 하든가 아니면 무명에 의해서 행이 있다]고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생사가 본래 없는 진리 속에서 생사의 고통을 받는 것을 자세히 말한 것이 12연기입니다만 쉽게 표현하면 (1) 혹(惑) (2) 업 (業) (3) 고 (苦)라고 합니다.
진리(dharma, 法)는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이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해탈입니다.
그렇다면 생사가 본래 없는 [불생불멸]의 세계에서 왜 생사를 받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미혹(迷惑)이나 착각에 의해서 본의 아닌 행동을 하게 되었고, 그 행동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혹 업고라고 합니다.
이 미혹에 대하여 예를 하나 들어 본다면, 어느 집 주인이 다른 사람을 한사람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주인은 값진 물건을 하나 잃어 버렸습니다.
주인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사람이 가져간 것 같지는 않고, 틀림없이 자기 집에서 데리고 있는 사람이 가져 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저 사람이 내 물건을 가져갔지" 이렇게 마음을 먹고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하나가 의심이 가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는 빨리 오지 않고, 화장실에 가면 늦게 나오고, 자기 방에 들어가면 뭘하는지 도대체 모르겠고, 틀림없이 자기 물건은 그 사람이 가져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집 주인은 이렇게 하루 하루 마음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가 어느 날 자기 친척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친척 집에 바로 자기가 잃어버린 물건이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왔을 때 물건을 놔 두고 그냥 돌아간 것입니다.
도둑으로 의심을 하고 보니까 그 사람이 틀림없이 도둑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도둑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도둑이 아닌데 주인이 스스로 도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도둑은 실제에는 없었고, 주인의 마음속에만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과 비슷한 것입니다.
진리에는 본래 죽고 사는 것이 없는데 우리 스스로의 감각에 의하여 죽고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이것이 바로 무명이며, 이것이 바로 잘못 본 것입니다.
잘못 본데 따라서 행위가 나오고 그 행위에 의해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어떤 사람이 동쪽을 보고 서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을 보고 서라고 했으면 그 다음 문제가 또 뒤따릅니다.
사실은 동에 있으면서도, "여기는 서쪽이고 동쪽은 어디냐고" 동에서 동을 찾습니다.
이것이 묘한 이치입니다.
본래 생사는 없는 것인데 생사가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다시 또 생사가 없는 세계를 구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생사가 없는 곳에서 생사가 없는 곳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동에서 동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생사가 없는 것은 해탈입니다.
인간의 참다운 생명은 본래 해탈입니다.
그런데 무명에 의하여 해탈 속에서 다시 해탈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 있어서 중요한 생사관이고 해탈관입니다.
생사라고 하는 것은 무명의 꿈에만 있는 것이지 진리의 실제에는 없습니다.
인생은 모두 무명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 무명의 꿈을 깨는 순간에 옛날 옛날 그 옛날부터 이미 해탈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사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승(高僧)들의 생사관
중국 영가(永嘉 665 - 713) 대사의 증도가(證道歌)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夢裡明明有六趣 몽리명명유육취
覺後空空無大千 교후공공무대천
꿈속에서는 분명히 6취의 세계가 있더니
깨고 보니 텅텅 비어 대천세계도 없구나
6취란 지옥, 아귀 ,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세계를 뜻합니다.
이들은 다 무명의 꿈속에서 분명히 느끼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무명의 꿈을 깨고 보면 이들은 본래 없는 세계입니다.
불법은 죽음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본래 없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불법이란, 감옥 속에 있는 사람에게 좋은 음식을 주고 좋은 옷을 주어 감옥 속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 그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 불법입니다.
감옥 자체가 없어지면 어떻게 지내든지 다 좋지만,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조금 좋은 밥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다고 한들 무엇이 그리 좋을 것이 옜겠습니까.
생사가 없은 줄을 확실히 알 때 정말로 즐거움이 있습니다.
항상 죽음에 대한 공포와, 기타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라면 진정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중생은 늘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생사가 본래 없는 것인데 있다고 잘못 보는 생각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서 근심걱정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신라시대에 원효(元曉 617 - 686)스님이 계셨고, 사복(蛇福)이란 동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사복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복은 원효스님을 초청해서 영가 법문을 하게 하였습니다.
원효스님은 법문을 하시기를
幕生兮基死也苦 막생혜 기사야고
幕生兮基生也苦 막사혜 기생야고
나지 말라 죽는 것이 괴로움이요
죽지 말라 나는 것이 괴로움이다.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복이 옆에서 듣더니 무슨 법문이 그렇게 길으냐고 하고는 다시 고쳐서 말하기를,
死生苦兮
나고 죽는 것이 괴로움이로다. 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괴롬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고 죽는 일이 제일 큰 고통이란 뜻입니다.
생사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바로 나는 것이요. 한생각이 사라지면 그것이 바로 죽는 일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한 순간에도 수없는 생각이 일어나고 수없는 생각이 사라집니다.
생사라고 하는 것은 한 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태어나는 일을 반복하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생사입니다.
그러니까 중생이 얼마나 고달프고 고통스러 우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가 없는 줄을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일체 구애를 받지 않아서 언제 어디서나 항상 자유롭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인(道人)들의 생활입니다.
중국의 당나라 때, 서당지장(西堂智藏, 735 -814) 선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선사에게 한 마을 선비(俗士)가 찾아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천당이 있습니까"
"있지요"
"지옥이 있습니까"
"있지요"
"생사가 있습니까"
"있지요"
이렇게 뭐든지 물어 보는 대로 다 있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을 선비는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지금 말씀을 잘못하고 계신 게 아닙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서당 지장선사는 "나는 잘못 말한 것이 없다." 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을 선비에게 묻기를 "혹시 나를 만나기 전에 다른 분을 찾아 뵙고 무슨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마을 선비는 "며칠 전에 경산(經山) 선사를 찾아 뵈었습니다.
그런데 경산서사의 말씀이 본래 천당도 없고, 지옥도 없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없는 것이다.
참다운 진리에는 본래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님께서는 모두 다 있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서당 지장선사는 다시 질문하기를 "경산스님한테 상투가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무슨 상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지당선사는 "그러면 당신에게는 상투가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선비는 "저에게는 상투가 있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이에 서당지장 선사는 "바로 그것입니다.
경산스님에게는 상투가 없고, 당신에게는 상투가 있습니다.
경산스님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와 지옥 천당이 모두 없는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없다고 한 것이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당신에게는 생사와 지옥 천당이 그대로 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문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마을 선비는 말할 수 없는 감명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진리를 체달해야 합니다.
생사의 고통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가 없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중생은 항상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오묘한 진리이고 안타까운 도리입니다.
생사가 없는 진리 속에서 생사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 중생입니다.
이것은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의 현상입니다.
자신의 업<業>에 따라 나고 죽는 일을 부질없이 되풀이합니다.
이에 좋은 업을 지으면 좋은 과보(果報)를 받고 나쁜 업을 지으면 나쁜 과보를 받습니다.
이는 바로 자업자득의 인과업보(自業自得,因果業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제자들은 완전한 해탈을 이룰 때까지 좋은 업을 지어서 좋은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업만 잘 지으면 과보는 저절로 이루어 집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순간순간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인과업보는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것도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오, 전생전생에서부터 많은 공덕의 업을 쌓았기 때문에 성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도인들이 대도(大道)를 성취한 것도 다 전생부터 닦은 업보에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인과업보의 진리를 깊이 믿고 늘 공덕을 쌓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공덕이 쌓이고 쌓여 복과 지혜가 풍족해지면 곧 해탈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공덕의 생활 이야말로 가장 보람 있는 생활이요, 가장 기쁜 생활입니다.
김대성의 전생 인연
삼국유사(三國遺史)의 끝부분에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란 항목이 있습니다.
내용은 신라의 김대성(金大性 700-774)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짓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짓게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그 대략을 기술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량리에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경조(慶祖)였습니다.
이 여인은 아들을 낳았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한 것이 성같이 컷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했습니다.
경조부인은 집안이 가난하여 아들 대성이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복안(福安)이란 사람의 집에 대성이를 고용살이로 보냈습니다.
그 집에서는 대성에게 밭을 몇 마지기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경주 흥륜사(興輪寺)에서는 대법회를 개설하고자, 한 스님이 복안의 집에 시주를 권하러 오셨습니다.
그 스님은 염불을 하시기를
檀越好布施 단월호보시
天神常護持 천신상호지
施一得萬倍 시일득만배
安樂壽命長 안락수명장
부제자로서 기쁜 마음으로 보시하면
천신이 항상 보호하도다
하나를 보시하면 만배를 얻어
생활은 안락하고 수명은 장구하리라.
게송으로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대성은 스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그의 어머니에게 가서 [제가 어느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부처님께 시주하는 것은 하나를 보시하면 만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전생에 공덕을 많이 짓지 못해서 금생에 이렇게 곤공한 것입니다.
금생에 또 보시하지 않으면 내세에는 더욱 곤란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품삯으로 받은 밭을 흥륜사 법회에 보시하여 내세의 좋은 과보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의견을 얘기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대성의 어머니도 그 뜻을 기특히 여기고 찬성하였습니다.
이에 대성은 자기의 밭을 부처님께 보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래 살아야 할 대성이 그만 죽은 것입니다.
바로 그날 저녁의 일이었습니다.
신라의 재상인 김문량(金文亮)씨 집에는 하늘에서 [모량리의 대성이 오늘 그대의 집으로 온다.] 이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집안 사람들은 놀라서 모량리에 가서 알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소리 들린 그 시각에 대성이 죽은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이에 김 문량씨 부인은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왼손을 7일만에 피는 것입니다.
손을 피고 보니[대성이란 두 글자가 완연하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그대로 대성이라 하였습니다.
대성은 전생 어머니인 모량의 경조부인을 모셔다 봉양을 하였습니다.
대성은 성장하여 현생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서 석굴암을 지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 대성이 금생 부모와 전생부모를 위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삼국유사를 지으신 일연(一然, 1206 - 1289)스님께서는 게송을 지어 찬탄했습니다.
牟梁春後施三묘 모량춘후시삼묘
香嶺秋來獲萬金 향령추래획만금
萱室百年貧富貴 훤실백년빈부귀
塊庭一夢去來今 괴정일몽거래금
모량의 봄에 밭을 조금 보시하더니
향령의 가을에 만금을 얻었도다.
어머니는 백 년 동안에 비.부.귀를 다 겪었고
아들은 한 꿈에서 삼생(과거생,현재생, 미래생)을 보냈도다.
향령은 석굴암 옆의 산등성이를 말합니다.
이처럼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대성에 대한 이야기는 인과업보가 분명함을 해주고 있습니다.
공덕을 지으면 그 과보가 반드시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김대성도 부처님께 밭을 시주하고 바로 재상의 집 아들로 태어나 부귀와 영화를 누리다가 역사에 길이 남을 뜻깊은 불사(佛事)를 하고 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도 이같은 사실을 깊이 믿고 공덕을 지어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공덕을 짓는 일이야 말로 전생의 죄업을 소멸하고 내생의 복덕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복을 짓는 일입니다.
작복(作福)의 길인 것입니다.
복에는 여러 가지가 있읍니다.
건강의 복. 물질의 복. 정신의 복. 지혜의 복. 진리의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탈의 복. 극락의 복 . 정토(淨土)의 복.이 있습니다.
복은 소유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말합니다.
복이 없으면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복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복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복 짓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덕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공덕을 이루어 가는 일에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발원]이 절실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원(願)이 철저하면 기필코 이루는 법입니다.
절실한 발원(發願)에 의해서 훌륭한 공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늘 간절한 발원으로 공덕을 지어가는 생활이 중요한 생활입니다.
용악(聳岳)스님의 전생인연
우리나라 조선 말기에 용악(聳岳, 1830 ~1908)스님이란 스님이 계셨습니다.
이 스님은 본래 북한에 있는 석왕사(釋王寺)스님이었습니다.
이 용악스님에 대해서는 통도사의 경봉(鏡峰, 1892 ~ 1982)스님께서 자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용악스님께서는 평소에 금강경을 계속 읽어서 살아계실 때 이에서 사리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용악스님은 석왕사에 계실 때 꿈을 꾸었는데 수암사라는 절에 가서 음식을 대접받고 차를 석 잔씩 자시고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 날짜를 기록해 두었는데 해마다 그 날이 되면 수암사에 가서 그렇게 대접을 받곤 하였습니다.
참으로 희한(稀罕)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왕사에는 손님으로서 한 스님이 오셨습니다.
그 스님은 이야기 끝에 수암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용악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 분께 수암사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은 [제가 수암사에 있습니다.
수암사는 멀리 오산에 있는 절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용악스님은 대단히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그 찾아온 스님을 보고 [스님께서 수암사에서 오셨다고 하니 내가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수암사는 부엌에까지 나무 홈대로 물이 들어가고 돌로 수각이 되어 있습니까?]하고 그 밖에 꿈에서 본 수암사의 대강 모습을 얘기하고 들림 없느냐고 물으니 모두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자신이 꿈에 음식 대접 받은 날을 가리키면서 그 날이 무슨 날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은 [예, 그날이 우리 오산 수암사의 중창주(重創主)되시는 스님의 제삿날 입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용악스님은 크게 느꼈읍니다.
자신은 전생에 오산 수암사의 중창주로 있다가 다시 태어나 이 몸을 받았기에 제삿날마다 꿈에 그 제사를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 중창주 되는 스님은 평소에 무슨 일을 하고자 원하시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께서는 해인사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인쇄해서 모셔 놓기를 늘 원하셨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용악스님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용악스님은 평소에 늘 생각이 떠나지 않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을 인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금생에 처음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전생에 오산 수암사에 있을 때부터 일찌기 원하던 일임을 알았습니다.
전생의 원은 금생에까지 그대로 남아서 계속 그 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금생에는 그 원을 꼭 이루려고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1896년(丙申年)에는 통도사에 가서 백일기도를 올렸습니다.
자기 힘만으로 그 불사를 이루기가 어려우니 부처님의 위대한 가피력(加被力)을 힘입어서 그 큰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해인사에 가서 또 백일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가피를 받은 용악스님은 그 소원을 무난히 이루었습니다.
나라에서 큰 시주가 되어 1899년에는 해인사 고려대장경 4부를 인쇄하여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등 삼보 사찰에 1부씩 모셨습니다.
그리고 1부는 전국의 사찰에 나누어 모셨읍니다.
이렇게 불사(佛事)를 마치신 용악스님은 그 소원을 무난히 이루었습니다.
용악스님은 입적(入寂)하기 3년 전에 당신께서 세상을 떠날 날을 알았습니다.
입적하는 그 날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입적하시는 그날 저녁이 되자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입적하신 것입니다.
입적하신 방에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했습니다.[異香滿室]
이러한 용악스님의 전생 인연과 금생 인연을 보고 우리는 깊이 깨달어야 합니다.
원을 간절히 세우면 생애가 바뀌어도 받드시 이루어집니다.
원을 뚜렷하게 세우고 그 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착실하게 정진(精進)하면 언젠가는 꼭 성취되기 마련입니다.
진리는 본래 생사가 없는 것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항상 고통 속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으니 이 일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원을 굳게 세워서 그 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멋지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살고 죽는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초월하고 생사에 자유로운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생사가 없는 진리를 체달한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이미 고통이 아닙니다.
평상시의 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초월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등은봉(鄧隱峰)선사는 세상을 떠날 때 거꾸로 서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스님은 돌아가시려고 할 때 대중들에게 물었읍니다.
"내가 본 바로는 앉아서 돌아가신 분도 있었고, 누워서 돌아가신 분도 있었다. 혹 서서 돌아사긴 분도 있느냐"
"서서 돌아가신 스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거꾸로 서서 돌아가신 분도 있었느냐"
"아직 없었습니다."
"그럼 나는 거꾸로 서서 죽어봐야 겠다"고 말씀하시고 거꾸로 서서 돌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서 있어도 옷이 하다도 내려오지 않고 그대로 딱 정리가 되어 몸에 붙어 있었습니다.
서 있는 시신을 아무리 사람이 밀어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등은봉 선사의 누이되는 분이 비구니 스님으로 있었습니다.
그분이 가까이 가서
"노형[老兄)은 평상시에도 율법을 잘 안 지키고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더니 죽을 때에도 다른 사람을 현혹하고 있습니까." 말하고 손으로 막으니 시신이 그대로 스스로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생사가 본래 없는 것이 진리이니까 그 진리를 체달하면 죽고 사는데 자유자재한 것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생사에 구애 없이 자유 자재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해탈의 세계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상생상락(常生常樂)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상생상락의 대해탈을 성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공덕을 쌓아가야 합니다.
정진을 계속해야 합니다.
오늘은 영가 법문을 통해서 불교의 생사관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一念忘時明了了 일념망시명요요
彌陀不在別家鄕 미타부재별가향
通身坐臥蓮華國 통신좌와연화국
處處無非極樂堂 처처무비극락당
마음이 깨끗하여 밝고 밝으면
아미타불이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로다
오고 가는 것이 극락이요
곳곳이 극락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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