般若心經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방대하고 심오한 경전이라 선각들이 들려준 이야기들
얄팍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 그때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아마 숨쉬고 있는 날까지 수정될 내용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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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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भगवतीप्रज्ञापारमिताहृदयसूत्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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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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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agavatī prajñāpāramitā hṛdaya Sū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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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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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와띠 쁘라지냐빠라미따 흐리다야 수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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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 Sū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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བཅོམ་ལྡན་འདས་མ་ཤེས་རབ་ཀྱི་ཕ་རོལ་ཏུ་ཕྱིན་པའི་སྙིང་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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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om ldan 'das ma shes rab kyi pha rol tu phyin pa'i snying 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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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전사
(티벳어 한글표기안) |
쫌덴데마 쎼랍기 파롤뚜친빼 닝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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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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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박가범의 어머니가 되는 반야바라밀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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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600권이나 되는 대반야바라밀다경을 한문으로 260자도 안되게 짧게 요약하여 대승 불교의 깊은 진리를 함축했다는 경전입니다.
동아시아에 한문으로 번역하여 전래한 사람은 동아시아사 단골 불교 서적인《대당서역기》를 지은 당나라 현장 법사.
서유기에서 삼장법사(=현장)가 고향을 그리워한다거나 앞길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심란해하면 손오공이 "스승님, 또 반야심경의 깊은 뜻을 잊으셨군요."라고 태클거는 장면이 제법 많이 나옵니다.
서유기에서는 저팔계가 삼장법사의 제자로 들어온 뒤 오소선사라는 인물이 대단하다며 추천하였고, 심경은 이 오소선사가 삼장법사를 만나서 전수한 것으로 나옵나다.
2. 특징
원래 현장 이전에도 반야심경이라는 불경 자체는 '마하반야바라밀다명주경'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알려졌습니다.
번역자는 현장 (649년 번역본)과 함께 불경 번역의 거두로 꼽히는 412년 쿠마라지바(구마라습)의 번역본.(출처: 대한불교청년회 게시판 및 동국역경원 불교사전) 다만 요즈음은 현장의 번역이 더 많이 유명합니다.
후술하겠지만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정한 반야심경 한국어 표준번역도 현장이 한역한 반야심경을 기준으로 합니다.
원래 반야심경도 다른 경전과 마찬가지로 석가모니가 반야심경의 내용을 설한 계기, 장소, 설해진 후의 결과 등이 다 쓰인 광본(廣本)이 있으나, 반야심경 자체가 짧으면서 핵심을 요약하였기 때문에 대승 불교 의식에서 보통은 이 짧은 반야심경이 독송됩니다.
그리스도교와 비교한다면 주님의 기도/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 이슬람에서는 알 파티하(개경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티베트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광본을 독송합니다.
이 산스크리트어 광본을 두고, 소품반야경과 대품반야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창작된 광본을 현장, 또는 누군가가 산스크리트로 역번역(back-translation)했다고 보는 불교학자(대표적으로 Jan Nattier)들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쓰는 관용구에 맞지 않는 표현이나, 중국식 언어습관이 섞인 산스크리트어 조어가 광본 이곳저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라고. 현재로서 반야심경 위경 논란은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없어서 결론이 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산스크리트 원본이 있었다 하더라도, 각 번역자의 선택에 따라 번역본 혹은 음역본이 쿠마라지바나 현장에 의해 첨삭되었다는 점은 대체로 학계에서 인정하는 편이며, 학계에선 현장과 쿠마라지바 둘 다 짧은 판본만 건드렸지 광본을 번역한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광본의 대표 역자로는 저 두 사람이 아닌 법월法月(739년역), 반야般若/리언利言(790년역), 법성法成(856년역), 지혜륜智慧輪(860년역), 시호施護(980년역) 등이 있습니다.
소본의 가장 오래된 산스크리트 사본은 일본 법륭사(法隆寺)에 패엽본으로 소장하고 있고, 광본의 산스크리트 사본은 일본 나라 하세데라(奈良 長谷寺)가 소장하였습니다.
반야심경의 내용은 대승 불교에서 핵심으로 다루는 '공 사상'을 설명합니다.
공 사상은 불교의 주요한 키워드이므로 불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졌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이 널리 알려진 경구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공 사상의 측면에서 보면'이라는 전제하에 초기불교의 교리가 깡그리 부정되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순서대로, 초기불교에서 무아를 설명하는데 쓰이는 오온과 육입처, 육경, 육식은 물론, 순관과 역관을 포함한 12연기의 제1항부터 제12항, 사성제가 깡그리 모두 '없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없다'고 하는 것은 진짜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자성(自性: 고정불변하는 실체, 혹은 본성)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반야심경 해설(2025. 03. 01. 추가)
(1) 마하
마하(Maha-, 摩訶)는 범어로 크다(大)는 뜻입니다.
마하의 크다는 뜻은 그냥 단순히 크다는 뜻이 아니라, 무한한 의미로서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대적인 의미로서 크다는 것이며, 영원한 의미로서 큰 실상이 바로 ‘마하’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의미를 마하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2) 반야
반야(prajna-)는 지혜라고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속적인 지혜가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반야를 최상의 지혜(最上智)라 하며 가장 완전한 지혜라고도 합니다.
우주와 인생의 참다운 진리를 체험한 진실한 지혜를 반야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야는 ‘해탈’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지혜입니다.
그리하여 반야를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이 어리석은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이 반야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반야는 그대로 생명의 실상을 체험한 지혜이며, 우주의 진리와 하나 된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반야의 광명이 나타났을 때 인간의 온갖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뇌는 이 반야가 완전히 구현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리하여 반야에 대해서는 그 가치와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3) 바라밀다
바라밀다(paramita-, 波羅蜜多)는 피안의 세계에 간다(到彼岸)는 뜻입니다.
해탈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말이며 극락의 세계에 친히 도달한다는 뜻이 바라밀입니다.
이것을 조금 깊이 해석하면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이루는 것이며 무엇이든지 새롭게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심경(心經)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줄여서 말할 때 『반야심경』이라 하고 더 간단히 말하면 ‘심경’이라 합니다.
여기에 쓰인 ‘심(心)’자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심장(心臟)의 뜻입니다.
즉 ‘반야바라밀다의 핵심(核心)적인 경전이 『반야심경』’이라는 것입니다.
경(經)이란 범어의 수트라(sutra)로서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을 다 경이라 합니다.
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이란 열 자의 제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야’입니다.
다른 말은 다 반야를 수식하는 말이고 반야의 역할과 공덕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반야이고 마하와 바라밀다(여기서 ‘다’는 의미에 해당, 보통 어미의 ‘다’를 생략하고 ‘바라밀’로만 쓰는 경우가 많음)는 반야에 대한 서술어입니다.
반야는 크고 깊고 영원하고 빛나고 우렁찬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반야는 바로 진리요, 지혜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예로부터 실상반야(實相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문자반야(文字般若)라 했습니다.
반야는 근본 마음, 밝은 마음, 항상스러운 마음, 무엇이든지 다 이룰 수 있는 마음입니다.
반야는 곧 청정심(淸淨心)이고 해탈심(解脫心)이고 본래심(本來心)입니다.
이러한 반야는 모든 공덕을 성취해 나가고 일체의 일을 다 이루어 가고 있으며 중생을 기쁘게 하고 부처님 나라를 건설합니다.
이렇게 한없는 공덕을 쌓아 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바라밀이라 합니다.
바라밀이란 새로운 세계로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장소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어두운 자기 자신이 밝아지는 것이 바라밀입니다.
이리하여 달라지고 변하고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다 바라밀입니다.
그런 까닭에 한없이 크고 밝은 마음으로 해탈세계를 이루어 가는 것이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의 지혜로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는 늘 새로운 정신입니다.
반야는 창조의 정신입니다.
‘새로운’이란 창조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새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활동을 계속해 나갈 때 진정한 바라밀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될 때 대승불교의 최상의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창조적 행위가 없는 해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정신에 의한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기 위하여 『반야심경』을 깊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강술
(1)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조견(照見) 오온개공(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께서는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행하실 때에 오온이 다 공한 것을 체험하시고 온갖 고통으로부터 최대의 기쁨을 이루시었습니다.
『반야심경』의 일곱 가지 번역 중에는 간략한 번역이 있는가 하면 앞뒤의 체제를 맞추어서 구체적으로 된 번역도 있습니다.
간략한 『반야심경』을 약본(略本)이라 하고, 구체적으로 된 『반야심경』을 광본(廣本)이라 합니다.
그런데 광본에는 서론, 본론, 결론이 다 갖추어졌으나 약본은 서론과 결론이 생략되고 본론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는 『반야심경』은 약본입니다. 그러므로 서론이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이십니다.
관세음보살은 『반야심경』의 설법주(說法主)이십니다.
설법주란 『반야심경』이 관세음보살에 의해서 설해졌다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은 관세음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말씀하신 경전입니다.
대승경전은 이러한 격식으로 설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반야에 의한 바라밀행을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자비행입니다.
자비는 반야에서 나옵니다.
반야의 힘으로 우주와 인간의 근본 실상을 확실히 보았을 때 자비의 실행이 왕성하게 실천됩니다.
자비가 없는 반야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반야심경』의 관세음보살에게서도 확연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실행하실 때에 인간의 근본을 확실히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견 오온개공’입니다.
반야는 조견의 능력이 있습니다.
조견하는 능력에 따라 참된 것과 헛된 것을 구별합니다.
이에 따라서 창조적 보살행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조견은 인식입니다.
반야는 참다운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확실한 인식에 의하여 용기와 행위가 일어납니다.
인식은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은 알고 있으나 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반야는 아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지식이 과거적이라면 인식은 현재적입니다.
인식의 모체가 되는 반야는 항상 현재 속에 있습니다.
현재 속에서 과거를 보고 현재 속에서 미래를 판단합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반야는 삼세(과거, 현재, 미래)를 통괄하는 인식입니다.
이러한 인식에는 미심쩍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명백하고 분명합니다.
이에 망설임이 없고 주저함이 없습니다.
반야에는 일절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두려움이란 모르는 데서 생겨나는 망상(妄想)입니다.
이 공포의 망상은 인간의 힘을 여지없이 빼앗아 갑니다.
그리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은 바보가 됩니다.
그러나 반야로서 사실 존재에 대하여 철저히 인식하면 용기 있는 실천으로 일관됩니다.
바로 부처님이 그러하시며, 관세음보살이 그러합니다.
이에 『반야심경』에는 ‘인식’의 문제를 ‘오온개공’으로 체험했고, ‘실천’의 문제를 ‘도일체고액’으로 전개합니다.
오온(五蘊)이란 인간을 말하는 것이며 개공(皆空)은 우주의 정대 평등을 의미합니다.
이 평등의 세계를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야의 체험에 의하여 끝없는 자비행이 전개됩니다.
이것이 모든 고통을 없애는 일입니다(度一切苦厄).
반야의 확실한 인식에 의하여 자신의 고통은 일시에 없어졌으며, 모든 중생의 고통을 자기화시켜서 노력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이러한 분이 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이 바로 그러한 보살이십니다.
그런데 경전 구성상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반야심경』의 설법주는 관세음보살이신데 어찌하여 관세음보살의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반야심경』을 관세음보살이 말씀했다면 관세음보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관세음보살의 말씀이 아닙니다.
‘관자재보살’로부터 ‘도일체고액’까지의 경문은 아난(阿難) 존자께서 관세음보살에 대하여 소개한 말씀입니다.
관세음보살께서 사리불(舍利弗)을 향하여 『반야심경』을 설하고자 하실 때에 아난 존자는 관세음보살을 위와 같이 소개한 것입니다.
사리자에서부터는 관세음보살의 설법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반야공이언등(般若共利言等)』의 번역본에 의하여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리자> 부분부터는 다음에 다시 설명. 추가합니다.
(2025. 03.18. 추가)
(2) 사리자(舍利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습니다.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입니다. 수상행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색이란 인간의 육체를 뜻합니다.
색이 바로 물질입니다.
그러므로 색은 인간의 육체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물질입니다.
이것을 인도에서는 사대(四大)라 했습니다. 즉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입니다.
이것이 어디든지 다 있다 하여 4대라 했습니다.
여기서 허공을 포함해서 5대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색이란, 색깔과 부피와 무게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는 감정의 느낌이며, 상은 상상(想像), 공상(空想)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행은 행동(行動), 동작(動作)입니다.
그리고 식은 종합적인 인식(認識)을 말합니다.
이에 수, 상, 행, 식은 모두 정신 작용입니다.
그리하여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은 육체와 정신을 통칭하는 것으로 인간을 의미합니다.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5온으로 본 것입니다.
보통 영혼이니 생각이니 말합니다만 사실은 다름이 아니라 수상행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수상행식의 작용은 항상 복잡하고 민활하게 돌아갑니다.
예를 하나 든다면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도 사고자 하는 물건을 고르다 보면 ‘좋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동시에 상상을 합니다.
이것을 사다 어떻게 쓸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직접 돈을 치르고 물건을 삽니다.
이것이 행입니다.
이에 식이란 이 물건에 대하여 세밀히 관찰하고 구상하고 용도에 알맞게 배치하는 것입니다.
이 수상행식의 작용은 항상 이렇게 연쇄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설사 육체가 잠이 든다 하더라도 행식의 작용은 꿈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몸이 죽는다 하더라도 행식의 작용은 계속됩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輪廻)입니다.
다음은 공에 대하여 설명해야 합니다.
공(空)이란 범어의 슈냐타(su-nyata)로서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존재입니다.
공이란 어떤 단순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현상과 없는 형상을 모두 포함했으면서도 이러한 유와 무의 세계를 초월한 내용이 ‘공’입니다.
공이란 절대로 단순한 허무의 세계가 아닙니다.
완전한 허무(虛無)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실존(實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허무와 실존은 중생의 수상행식의 착각입니다.
이 세상의 존재는 오직 ‘공’ 그것일 뿐입니다.
공에는 ‘있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에는 ‘없는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무를 초월한 그 공의 실상(實相)의 존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 점은 『반야심경』의 다음 구절을 보면 명확해집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이 공이며 공이 색이다. 수상행식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수상행식과 다르지 않다. 수상행식이 공이며, 공이 수상행식이다.”
이러한 말씀은 바로 공의 본질(空性)을 천명한 것입니다.
공의 본질은 바로 5온(색수상행식)이요, 5온의 본질은 공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색의 본질은 공입니다.
우리 몸의 본질은 공입니다.
모든 물질의 본질은 공입니다.
감정의 본질은 공입니다.
상상의 본질. 행동의 본질. 인식의 본질은 공입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본질은 공입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존재도 본질에 있어서는 다 공입니다.
그러면 공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공의 본질은 색입니다.
공의 본질은 우리의 육체입니다.
공의 본질은 이 세상의 모든 물질입니다.
공의 본질은 수상행식입니다.
공의 본질은 우리의 정신입니다.
공의 본질은 이 세상의 모든 사상 체계입니다.
세상은 그대로 공이요, 공은 그대로 세상입니다.
모든 존재는 바로 ‘공’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이 밝히고 있는 공의 본질입니다.
(3) 사리자(舍利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사리자여! 이 제법의 공한 형상은 생기는 것도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며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며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이 대목은 공의 형태(空相)를 밝히는 구절입니다.
앞의 문절에서는 공의 본질을 천명한 데 이어 지금의 대목에 와서는 공의 형상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은 어떠한 모양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제법이 공이라면 공은 생김새가 어떠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제법이란 색수상행식 오온을 말합니다.
5온이 다 공한 모양에 대해서는 『반야심경』에서 6상(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불생상 ② 불멸상입니다.
공의 형태는 불생불멸의 형태입니다.
공에는 태어나는 본질이 없고 없어지는 본질이 없습니다.
공에는 있는 본질도 없고, 없는 본질도 없습니다.
유와 무를 초월했습니다.
오로지 불생불멸의 중도상(中道相)일 뿐입니다.
공은 유무를 초월한 진실상(眞實相)일 뿐입니다.
진실상이기에 공에는 공상이 없습니다.
공상이 없기에 불생상입니다.
공에는 없지만 없는 모습이 없습니다.
이것이 불멸상입니다.
있는 본질도 없고 없는 본질도 없습니다.
없지 않은 본질도 또한 없습니다.
그대로 불생불멸상일 따름입니다(無相無空無不空 卽是如來眞實相).
③ 불구상 ④ 부정상이 공상입니다.
공의 얼굴에는 더러운 모습이 없고, 깨끗한 모습도 없습니다.
더러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더러운 것으로 잘못 보았을 뿐입니다.
깨끗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깨끗한 것으로 잘못 보았을 뿐입니다.
더럽고 깨끗한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생의 수상행식의 착각에 의해서만 더럽고 깨끗한 감정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⑤ 부증상 ⑥ 불감상입니다.
불어나는 것과 줄어드는 본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증불감일 따름입니다.
커지는 듯하다 작아지며, 작아지는 듯 보이다 커지는 현상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생의 허망한 인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큰 것에 큰 본질이 없고 작은 것에 작은 본질이 없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증불감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 공상입니다.
공상은 생사를 초월했고 유무를 초월했습니다.
시비(是非)와 애증(愛憎)을 다 초월했고 유무를 초월했습니다.
진리(正法) 그 자체로서 진실상 중도상일 뿐입니다.
공상을 감정적으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공상은 생각되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보여지는 내용입니다.
반야에 의해서 공상은 보여집니다.
반야는 공상 그 자체입니다(實相般若).
그러므로 제석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제법이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평등하고 진리가 불생불멸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불생불멸이라 했습니다.
공은 중도(中道)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도 중도입니다.
이에 중생의 망상은 공연한 망상일 뿐입니다.
공의 중도상은 망상에 의해서 인식되어지지 않습니다.
‘공’은 망상으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오직 반야의 정관(正觀)에 의해서만 공이 보입니다.
반야는 곧 공입니다.
수상행식이 반야의 눈을 뜰 때 반야는 곧 공입니다.
그대로 불생불멸의 광명입니다.
(4) 시고공중무색(是故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이런 까닭에 공에는 색이 없으며, 수상행식이 없습니다.
공중(空中)에는 5온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온은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공이란 뜻입니다.
공은 불생불멸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존재는 불생불멸의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에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에서의 ‘5온개공과 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은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입니다.
5온의 본질은 공입니다.
공상은 불생불멸입니다.
그리하여 공중에는 색수상행식이 없습니다.
자아(自我)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아(無我)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론입니다.
그러나 공의 본질은 곧 색입니다(空卽是色).
공의 본질로서의 수상행식은 동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소멸되어도 행식의 동작은 중지되지 않습니다.
행은 곧 업(동작, 활동)입니다.
그리하여 행식은 업식(業識)이란 말로 많이 표현합니다.
공의 본질로서의 업식은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 육체가 소멸되어도 또 다른 육체를 형성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론(輪廻論)입니다.
이리하여 불교는 무아론과 윤회론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습니다. 정
말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이런 까닭에 불교는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진리가 그러한 것뿐입니다.
공은 불생불멸이기에 분명히 무아이나 업식의 작용은 또한 계속되어서 윤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론과 윤회론인 것입니다.
분명히 무아(無我)이고 분명히 윤회(輪廻)입니다.
틀림없이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입니다.
그러므로 불생불멸이면서 능생능멸(能生能滅)인 것입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불생불멸이면 어째서 능생능멸이며, 무아이면 어째서 윤회가 있단 말입니까.
중생의 업식(業識)작용이 계속되니까 불생불멸 속에서 생멸이 있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실상에는 무아요 불생불멸이란 것입니다.
(5)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공에는) 눈, 귀, 코, 혀, 몸, 생각이 없으며, (공에는) 빛과 소리, 냄새, 맛, 촉감 그리고 생각에 의해 생각되어지는 모든 존재[法境]가 없습니다.
이것을 보통 육근(六根)·육경(六境)이라 합니다.
인간에겐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습니다.
시각(눈), 청각(귀), 후각(코), 미각(혀), 촉각(몸), 지각(의식)이 그것입니다.
이에 의존해 외부로부터 사물의 존재를 느낍니다.
이것을 12처(十二處)라고 합니다.
우리는 12처의 굴레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에는 12처가 없습니다.
공은 불생불멸이기에 12처는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은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실행하는 보살은 십이처를 초월합니다(照見五蘊皆空).
이를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출가를 하여 그 절에서 준 『반야심경』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에서는 ‘안이비설신의’가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는 분명히 눈, 귀, 코 등 모든 신체 기관이 있는데 『반야심경』에서는 없다고 했으니 경에서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이 자기 몸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스님께 찾아가서 또 여쭈어 보았습니다.
“나에게는 내 몸이 분명히 있는데 어째서 『반야심경』에서는 온몸이 다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이 질문을 받은 스님께서는 번개처럼 대답하기를 “양각이 일보이다(兩脚一步)” 하였습니다.
두 다리가 한 걸음이란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 수행자는 크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중생이 몸의 구속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반야바라밀에는 본래 안의비설신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한 진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확연히 깨달은 다음에는 인생과 우주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반야심경』을 일찍 만난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수행자는 훌륭한 도인 스님이 된 것입니다.
(6)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
안식계에서부터 의식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없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의 공 중에는 18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18계의 명칭을 다 열거하지 않고 제일 처음의 안계(眼界)와 맨 마지막의 의식계(意識界)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내용은 내지(乃至)란 말로 생략했습니다.
18계가 본래 불생불멸인데 중생은 그 참다운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괴로움에 시달립니다.
꿈속에서 꿈인 줄 모르고 걱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은 18계의 업습(業習)에 의하여 계속 윤회합니다.
불교에서는 108번뇌란 말을 씁니다.
이름을 붙여 108번뇌가 되는 것이지 사실은 우리의 6근 감각에 있습니다.
우리 감각이 평정하면 번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이 미혹에 빠지면 그때에는 108번뇌뿐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번뇌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번뇌에 의하여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생불멸의 세계에 도달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18계에 있으면서 18계를 초월합니다.
이것이 도인의 생활이고 해탈의 감정입니다.
(7)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무명이 없으며, 무명이 다 없어진 것도 없으며, 그뿐 아니라 노사가 없으며 노사가 다 없어진 것도 또한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12연기(十二緣起)가 없다는 진리를 밝힙니다.
12연기의 항목을 보면 ①무명(無明) ② 행(行) ③ 식(識) ④ 명색(名色) ⑤ 육입(六入) ⑥ 촉(觸) ⑦ 수(受) ⑧ 애(愛) ⑨ 취(取) ⑩ 유(有) ⑪ 생(生) ⑫ 노사(老死)입니다.
이 십이연기는 사실 다 함께 연결된 것입니다. 무명이 있으면 자연히 생·노사까지 있게 되며, 노사가 있는 데는 무명과 기타 항목이 다 있게 됩니다.
이 12연기는 연쇄적 메커니즘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 없어진 상태도 없다고 합니다.
노사도 없고, 노사가 없어진 상태도 없다고 합니다.
반야바라밀은 불생불멸입니다.
그러므로 생과 사가 없습니다.
생과 사가 본래 없으니 생사가 다 없어진 상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반야바라밀에는 무명이 본래 없으니 무명이 없어진 ‘흔적’인들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무명도 없고(無無明) 무명이 다 없어진 상태도 없습니다(亦無無明盡).
그뿐 아니라 노사도 없고(無老死) 노사가 다 없어진 상태도 없습니다(亦無老死盡).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세계입니다.
(8)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고, 집, 멸, 도가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은 불생불멸의 실상으로서 고집이 없으니, 멸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에는 고집멸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야바라밀을 이루지 못하고 무명의 굴레에서 맴도는 중생은 어느 일 찰나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중생은 자신의 고통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 괴로움이 없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는 다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괴로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야바라밀을 성취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에는 고통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9)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습니다.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고승이신 원측 스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지혜는 ‘깨달음(菩提)’이고, 얻음은 ‘열반(涅槃)’입니다.
지와 득은 바로 보리, 열반입니다.
반야바라밀에는 보리, 열반이 모두 없습니다.
불교에 보리, 열반처럼 좋은 것이 없는데 어째서 반야바라밀에는 보리, 열반이 없을까요. 비유로 말한다면 어느 사람이 땅에 넘어졌다가 땅에서 일어났을 경우, 사람에게는 넘어지는 일도 있고 일어나는 일도 있지만, 땅은 넘어지는 일도 없고 일어나는 일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에게는 미혹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속박이 있고 해탈이 있지만 불생불멸의 반야바라밀에는 이런 일이 본래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에는 5온, 12처, 18계, 12연기, 4제, 보리, 열반이 모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세계입니다.
반야바라밀에는 온갖 것이 다 가명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실존이란 없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반야의 공상(空相)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힙니다.
“5온, 12처를 초월합니다.
12연기를 모두 초월합니다.
그런 까닭에 고집멸도 4성제가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리 열반도 반야의 공성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야의 공성에는 생사가 없습니다.
열반도 없습니다.
생사, 열반이 모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도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空空, 大空].
일체의 존재를 다 초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상(實相) 반야의 진리입니다.
이것이 반야의 공상입니다.
반야로서 진리와 하나가 됩니다.
반야의 세계는 이런 세계입니다.
이런 세계는 일절 공포가 없습니다.
공포가 없는 사람에게서 불가사의한 자비가 나옵니다. 이것이 관조(觀照)반야의 세계입니다.
(10)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보리살타(菩提薩?)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고심무가애(苦心無쯀碍) 무가애고(無쯀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遠離顚) 도몽상(到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
존재하는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들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쓸데없는 집착을 다 버리고 가장 높은 열반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반야바라밀의 공상에는 얻을 것이 없습니다.
절대 평등의 세계이기에 그러합니다.
평등에는 얻을 것이 없습니다.
평등의 세계에는 생사와 열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보살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으므로 온갖 망상과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그리하여 보살은 궁극적인 열반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생사와 열반이 없는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구경열반인 것입니다.
중생은 항상 얻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실상은 얻어지는 것이 아닌데 감정은 얻으려는 생각으로 늘 급급합니다.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늘 괴로움이 따릅니다(有求皆苦).
그러나 얻으려는 생각이 없으면 항상 즐겁습니다(無求皆樂).
반야바라밀에 의지한 보살은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구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삶을 구하지도 아니하고, 죽음을 구하지도 아니합니다.
세상을 취하려고도 않고, 버리려고도 않습니다.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반야바라밀에 의지한 보살은 일절 걸림이 없습니다.
걸림이 없기에 공포가 없습니다.
온갖 쓸데없는 망상을 다 버렸습니다.
전도몽상을 다 여읜 것입니다. 보살은 이리하여 대해탈 대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11) 삼세제불(三世諸佛)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 득아뇩다(得阿耕辱多) 라삼먁삼보리(羅三花三菩提)
삼세 제불께서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셨기 때문에 최고의 정각을 이루시었습니다.
보살들만 반야바라밀에 의지해서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다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정각을 이루신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변정각(無上正遍正覺)’을 의미합니다.
이는 가장 높고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올바른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줄여서 표현할 때 무상정각(無上正覺)이라 합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결과도 다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12) 고지반야바라밀다(故知般若波羅蜜多)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대신주이며, 대명주이며, 무상주이며, 무등등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최상의 주문이며 비교될 만한 것이 없는 월등한 주문이란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인 언어를 가지고 반야바라밀을 말했으나, 여기서부터는 비밀한 언어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부분을 현설반야(顯說般若)라 하고 뒤의 부분을 밀설반야(蜜說般若)라 말하기도 합니다.
밀설이란 비밀로 이루어진 반야란 뜻입니다.
주(呪)란, 범어의 다라니(Dháran.i)로 진언(眞言)이라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에 포함된 뜻은 모든 것을 다 총섭하고 있다(總持)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액난을 막는다는 의미(能遮)도 있습니다.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대신주(大神呪)라 했습니다.
신비로움을 헤아릴 수 없어서 온갖 번뇌를 다 소멸시킨다(能破煩惱)는 뜻입니다.
그다음 대명주(大明呪)란 모든 어리석음을 근본적으로 물리친다(能破無明)는 뜻이며, 무상주(無上呪)란 모든 보살행을 다 원만히 이루게 한다(令因行滿)는 뜻이며, 무등등주(無等等呪)란 최고의 덕성을 성취해서 대해탈, 대열반을 이룩하게 한다(令果德圓)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신묘하고 불가사의한 위신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이 헤아릴 수 없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앞의 부분에서 반야바라밀의 세계를 성취한 사람은 바로 보살행으로 자족할 수 있습니다.
보살행은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到一切苦厄).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은 사람이 비밀한 말씀을 통해서 신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비밀로 설해지는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중생의 소원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13)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진실불허(眞實不虛)
능히 일체의 고통을 제거합니다. 진실하여 헛됨이 없습니다.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신비하고 헤아릴 수 없어 일체의 고통을 다 제거하게 됩니다.
반야바라밀을 실행할 때에는 깊은 관조(照見五蘊皆空)의 능력을 통해서 일체의 고통을 다 제거합니다(度一切苦厄).
그러나 반야바라밀의 신비한 위신력을 믿는 사람은 ‘대신주 대명주 무상주 무등등주’의 힘으로 모든 괴로움을 다 제거합니다(能除一切苦).
반야바라밀다는 진실한 내용입니다.
전혀 헛됨이 없습니다(眞實不虛). 이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말한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은 불가사의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밀한 언어의 반야바라밀로 중생의 고통을 다 제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14) 고설반야바라밀다주(故說)般若波羅蜜多呪) 즉설주왈(卽說呪曰)
아제아제(揭帝揭帝) 바라아제(波羅揭帝) 바라승아제(波羅僧揭帝) 모지(菩提) 사바하(娑婆訶)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합니다. 곧 주문을 설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 부분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선 다라니의 음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로 읽습니다.
그런데 범어의 음에 가깝도록 발음하면 ‘갸퇴갸퇴 바라갸퇴 바라샹갸퇴 보드히 스바하’가 가까운 음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아제아제’로 읽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 음계의 특성이 인도와 다르기 때문에 ‘갸퇴’가 ‘아제’로 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범어의 『반야심경』이 ‘갸퇴갸퇴’로 된 주문이 있고, ‘아제아제’로 된 주문이 있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문 『반야심경』에는 ‘아제아제’로 표기된 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도 언급한 것처럼 불교에서 반야부 경전은 그 양이 방대하지만 내용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반야심경』은 그중에서도 반야부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심경’이니까 더욱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다른 반야부 경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반야심경』에는 ‘반야바라밀’이 생명입니다.
반야는 바로 진리의 실상입니다.
이것을 ‘공’이라 하였고 ‘공’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내용이라 했습니다.
이 공의 세계는 반야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반야 그 자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반야의 본체는 ‘불생불멸’입니다.
공은 반야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공은 어떤 상대적 허무의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반야는 그 공능(功能)으로 최고의 해탈을 성취합니다.
『반야심경』 본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최상의 열반을 이루고, 삼세 제불께서도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무상정각을 성취하셨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은 신앙과 발원을 강조하였습니다.
경의 후반부에서는 밀설(密說)반야를 통해서, 반야바라밀은 ‘대신주, 대명주, 무상주, 무등등주’이기 때문에 능히 온갖 고통을 다 제거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반야바라밀에 대한 신앙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어서 마지막 진언을 통해 처음의 반야바라밀의 내용을 다시 천명하는 동시에 간절한 발원(發願)을 담고 있습니다. 발원이 간절하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반야심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을 통해 반야의 인격을 보였으며, 불생불멸을 통해 반야의 실상을 천명하였고, 보살과 부처님을 통해 반야의 공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에 의한 신앙과 반야바라밀에 대한 발원으로 『반야심경』의 종반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글자 수는 전부 합해 270자 밖에 안 되는 짤막한 경이지만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법보(法寶)인 것입니다.
이러한 『반야심경』을 불자 여러분도 생활 속에서 항상 봉독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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