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卍 Buddhsim, 부처님 말씀/불교를 알기 쉽게

선(禪)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

by Yeon Ha Cheon 2025. 2. 9.

네팔, 안나푸르나 산군의 마르디히말 오스트리아캠프 인근의 티벳승려
(부처님은 법당에만 계시는 것이 아닌, 어디에나 계시는 부처님!. 탄생지인 네팔에서 그것도 무아지경의 경계에서 한없이 바라보이는 그 대상, 그 대상이 세계 3대 미봉의 하나인 .마차푸차레,[물고기 꼬리, 실제 물고기 꼬리 모양으로 서양에서는 피쉬테일이라 불리운다]. 그 안나푸르나 산군이 곧 부처님이 아닐까?)

 

 

아래 사진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올라가다 보면 중간에 촘롱마을에서 시누와를 가다보면 보이는 "마차푸차레"인데 정말 물고기 꼬리 모양으로 생긴 아름다운 산이다.

 

선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
 
오늘은 선학(仙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날은 선()에 대해서 관심이 매우 많습니다.
특히 미국이나 기타 나라에서는 세계적인 추세의 하나로 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중에 하나로서는, 현대의 문명사회라 하는 것은 자기를 돌아볼 기회가 흔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자기자신에 대한 공허감을 느끼고 자기의 생활에 대해서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 현대문명의 고독감이고 소외감입니다.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돌아볼 기회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운동의 하나로, 더 나아가서는 공허한 정신을 메꾸어가는 방법의 하나로 선에 대하여 괸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원대한 뜻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발견해 보고자 하는 의욕적인 동기의 하나로서 선에 대한 관심은 세계적으로 지대한 입장에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젊은 층에서 선에 새롭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의 의의(意義)
 
그러므로 선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내용이며 실제로 어떻게 우리가 생활 속에서 소화할 수 있고 응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알아본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먼저 선의 의의와 실제라고 하는 제목을 통해서 잠시 선학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제일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선이란 무엇인가?',  선의 의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은 범어(梵語)의 드야나(dhyana, 禪那)라고 하는 말을 음역(音譯)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여기에 끝의 모음 아 자가 생략이 되어서 드야나가 그냥 [�] 이렇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한자로 옮겨 써지면서 '터닦을  ()' 이렇게 발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포함된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선이란 명상이라 이렇게 번역하고, 사유수(思惟修), 생각 사 자, 생각할 유 자, 닦을 수 자로 써서 사유수라고도 하고, 고요히 생각한다고 해서 공덕총림(功德叢林)이다 이렇게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모든 내용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선은 바로 마음을 닦는 일이다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은 바로 수심법(修心法)입니다.
마음을 닦는 법이 선입니다.

여기에 선의 무한대성과 상당한 함축성이 있고, 이렇게 무한성과 함축성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선의 난해성이 있습니다.
선을 어떻게 규정지을 수 없는 성격이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한계를 초월해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닦는 일이야말로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그 수준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마음을 닦고자 하는 것도 마음이요, 닦아져야 할 마음도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완전하게 닦여진 상태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의 궁극적인 이상에 있어서는 마음을 닦는 다고 한다면 이미 닦은 이미 닦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합니다
여기에 선의 오묘함이 있습니다.
마음을 닦는다고 하면 이미 닦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닦지 않아도 되느냐 하면 닦지 않아서도 또한 안 됩니다.

 

그런 까닭에 이 선의 궁극적인 세계라고 하는 것은 벌써 선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선이 아닌
것이 되고, 선이 아니라고 주장을 해도 또한 선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선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여기에 수련을 하는 사람이 몸소 체험을 해서 누가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판단하느냐를 떠나서 스스로 자신을 세우고 스스로 소신이 확정돼서 자기가 여기에 수용(受用)하고 자재(自在)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의 생명적(生命的) 자재적(自在的) 자유의 입장이 선입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다른 논리에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선은 자기 스스로 마음을 닦아서 자기 스스로 수용하고 자기 스스로 자재하는 것입니다.

선의 유형
그러면 이와 같이 마음 닦는 운동의 하나로 선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면, 선은 어떠한 유형이 있느냐, 이것이 또한 알아볼 만한 과제가 됩니다. 

오늘날 선이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 형태로서 참고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전체적으로 볼 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도선을 들 수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중국선인데, 중국선 중에는 천태종(天台宗) 계통에서 하는 선과, 또는 달마선사(達磨禪師) 이후로 달마선사를 중심으로 하는 선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선의 전체적 유형은 '인도선, 천태선, 달마선'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선의 양식이 있고 법도가 있지만, 이 세 가지를 가지고 파악할 때 대충 이 세가지에 해당됩니다.

 
 선의 기원(起源)
그러면 이러한 선들이 언제 어떻게 발생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선의 기원(起源) 문제라 이렇게 이름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선의 기원에 있어서는 첫째 인도에서부터 수련되어 왔던 선, 즉 인도선은 그 기원이 요가(yoga)에서부터 찾아집니다.
요가는 인도 고유의 수련법으로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인도의 고유한 요가 수련법에 의해서 수련을 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수련되어지는 모든 인도식 선의 방법은 요가가 그 기원이 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련한 선은 요가 수련의 입장에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수련하신 것은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부처님 이전의 요가 수련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하늘나라에 가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생천(生天) 사상이 강했습니다.

하늘에 가서 태어나기 위해서 정신을 수련하고 또 여러 가지 명상을 익히고 이렇게 수련을 했으며, 두 번째는 육체적 건강을 도모하는 한 방법으로 선을 수련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대에 와서는,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선을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본성(本性)으로 돌아가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해탈을 도모하는 데로 그 방향이 비뀌어졌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선은 하늘에 가서 태어나는데 목적을 두었으나, 부처님께서 하신 선은 마음을 밝히는 선이요, 해탈을 도모하는 선입니다.
 

그래서 요가는 불교 이전부터 있었고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시대에 와서 더욱 권장이 되고 더욱 강조가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불교도에 의해서 이 선적인 방법이 많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방법에는 불교의 선이나 불교 이전의 요가가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만, 그 취지나 목적에 있어서, 전자는 생천(生天)을 도모한다고 한다면 후자는 해탈을  도모하는 데 있습니다.
 
두 번째 천태선은 중국에 와서 천대 지자대사(智者大師, 538 ~ 597)가 세운 법화종에 의해서 강조가 됐는데, 이 천태선은 <법화경>을 비롯한 대승교리가 그 내용이 되고  방법에 있어서는 인도의 요가 수련법을 그대로 형식상으로 옮겨와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리하여 천태선은 <법화경> 사상과 인도의 요가 형식이 한데 어우러져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달마선입니다.
달마선은 어떻게 해서 성립이 되었느냐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달마선의 기원에 있어서는 학설이나 전통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를 든다면

달마선 안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삼처전심(三處傳心)에 그 기원이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이것이 전통적인 설입니다.
그런가 하면 학술적인 입장에서 추구해 본다면 그것보다도 이 달마선은 대승불교와 노자(老子) · 장자(장子)의 사상즉 노장 사상에서 연유가 되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고찰해 본다면, 전통적인 설에 의지해 볼 때 이 달마선의 기원이라고 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한 번은 설법을 하고 계신 데 가섭존자가 늦게 왔기 때문에 자리가 없어서 앉지 못하고 있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이 당신이 앉은 자리를 반으로 나눠주면서, '여기에 앉자'[분반좌(分半座)]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같이 앉은 것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마음을 전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법화경을 설하실 적에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꽃 한 송이를 턱 내보이셨는데그 꽃을 들어서 보인 참뜻을, 그 진리를 아무도 모르는데 가섭존자만이 알아듣고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거염화(擧拈華) 또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 이것이 또한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구시라 성에서 열반에 드셨을 적에 가섭존자가 늦게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최후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 관 안에서 부처님이 두 발을 밖으로 내 보였습니다.
[
곽시쌍부(槨示雙趺)] 이것이 바로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세 곳에서 마음을 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셨다고 하여]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합니다.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를 떠나서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되고 받고 하는 것인데 부처께서 삼처전심하신 것이 바로 선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이 달마선의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그런데 학술적으로 본다면 단순히 그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배경과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서 사건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그것은 무었보다도 대승불교가 근간이 되고 여기에 중국에서 발생한 노자 · 장자의 노장사상(老莊思想)이 같이 원융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학술적인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오늘날에 와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서, 그렇게 보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에서 강조되고 있고 논의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대승경전의 전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한두 가지 상황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 전체가 선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고, 이것이 또한 중국에 들어와서 잘 발전되고 성장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오늘날에 있어서 전체적인 견해입니다.

 

선의 종지(宗旨)
그렇다면 이 선에서는 어떠한 원리와 이상을 강조하고 있는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선의 종지(宗旨)라고 합니다.
선에서는 어떠한 내용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고자 강조하는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달마선에서는 열 여섯 자로 집약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불립문자(不立文字), 즉 언어와 어떤 이론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지만 그 가르친 언어의 안에서 선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 밖에 어떠한 내용을 강조하고 있고, 이 말 밖에 별도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봅니다.
이것을 교외별전이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합니다.
바로 사람 마음의 실상을 가리킨다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견성성불(見性成佛) 입니다.
인간의 참다운 성품을 보아서 바로 부처가 되도록 하는 것, 또 바로 부처가 되는 것, 이 것이 선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이 열여섯 자가 그대로 선의 종지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교리나 어떤 이론을 숭상하기보다는, 인간의 마음으로 바로 돌아가서 즉시에 성불하고 즉시에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기본입니다그런 까닭에 선에서 강조하고 있고, 선에서 시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풍속과 언어는 일반적인 불교의 전통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선과 불교의 관계

이리하여 옛부터 선과 교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을 많이 말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이 우월하다, 선이 제일이다, 이렇게 강조를 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불교를 떠나서 선이 있을 수가 없다, 부처님의 교리를 떠난 그것이 과연 불교라고 할 수 있느냐고 쟁론을 벌여 왔습니다.

 

이리하여 선과 교의 문제는 하루이틀 사이의 문제가 아니고 적어도 천 년 이상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불일(佛日)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 ~1210) 스님이 계셨는데, 보조스님께서는 <진심직설(眞心直設)>이라는 저술 속에서 불교와 조교(祖敎)라는 말로 선과 교를 구분했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것이요, 조교는 바로 조사(祖師)의 가르침, 즉 선을 말합니다.
기타 많은 분들이 선과 교를 얘기해 왔습니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 혹자는 말하기를, 달마선은 불교가 아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립문자를 말하고 교외별전을 말하는가 하면, 선에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도 얘기합니다.
참다운 선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야만 참다운 선사다, 이렇게도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교의 경전은 다 마귀의 말[魔說]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불,, 삼보인데 선에서의 삼보라고 하는 것은 벼와 보리와 콩이다(禾 麥 太)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불교 입장에서 볼 때 전혀 불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은 불교가 아니고 노장(老莊)사상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다 옳은 견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선사들이 다른 종교인이라고 자처한 적은 절대로 없습니다.
많은 선의 전문가들이 다 불교의 스님이요, 바로 불교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사들이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고 바로 불교인인데 여기에 왜 불교이면서 일반 전통적인 불교와 선의 불교가 차이점이 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이유가 무었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느 학자는 아주 명쾌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선종은 육바라밀 중에 반야종(般若宗)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육바라밀에 있어서 반야가 최고에 속하는데, 선종은 그 반야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종파이지, 다른 교리나 격식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가 아니다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인도선과 천태선은 육바라밀 중 제5에 속하는 선정종에 속할 것이고, 달마선은 반야종에 해당한다 이렇게도 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선종은 불교는 불교로되 다른 교리나 격식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가 아니고, '반야(般若)', 즉 부처님의 마음을 중시하는 불교의 종파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선은 바로 불교에 있어서 불심종(佛心宗)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선과 교를 보는 견해로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또 불교교리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강조해 왔습니다.
[
선시불심 교시불어(禪是佛心敎是佛語)]

여기에 선과 교는 같은 면도 있지만 다른 면도 있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마음으로 돌아가서 볼 때에는 같지만, 형식으로 돌아가서 볼 때에는 교리의 교종과 선종과는 전혀 다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선의 방법

 

그러면 이와 같은 선종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견성성불을 도모하는 것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간략히 서술해 본다면 인도선과 같은 방법은 수식관(數息觀),  부정관(不淨觀), 백골관(白骨觀)이라고 해서 자기의 호흡을 하나하나 센다던지 인간은 다 백골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을 관념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태선에서는 우선 감각과 생각을 중지하고 깊은 진리와 마음의 세계를 관찰한다고 해서 지관법(止觀法)을 쓰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달마선에 있어서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첫째 벽관(壁觀)을 듭니다
사람의 여러 가지 시선이나 청각을 중지하고 벽을 향해서 자기 본래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벽관입니다.

그 다음에는 좌선(座禪)입니다고요히 앉아서 자기 마음의 세계를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반조(返照), 즉 항상 내 마음에 돌아가서 자기 자신을반조해 본다 하는 것입니다.

 묵조(默照), 즉 묵묵히 비추어 본다,

 간화(看話) 곧 어떤 선사나 부처님의 말씀은 어떻게 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그 이유에 대해서 자꾸 참구(參究)하고 생각해 보는  그러한 것이 바로 간화입니다.

 

그러므로 선에서는 면벽관심(面壁觀心)이라든지 또 좌선이라든지 반조나 묵조나 간화 등의 방법으로 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함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견성성불이 이루어지고 참다운 마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의 역사

 

그러면 이러한 달마선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발달해 왔느냐 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이 선은 6세기 초 서기 527년에 바로 달마선사께서 중국에 오셔서 선법(禪法) 선양함으로 말미암아 바롯되었습니다.

 

이 달마선사의 제자분 중에는 혜가(慧可; 487 ~593)선사가 있고 혜가선사의 제자로는 승찬(僧璨)선사가 있으며 승찬선사의 제자로는 도신(道信 ; 580 ~ 651)선사도신의 제자에는 홍인(弘忍, 602 ~ 675)선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홍인선사에게서는 유명한 신수(神秀 ; 606 ~706)선사와 혜능(慧能 ; 638 ~ 713)선사가 배출됩니다신수선사는  북쪽지방을 중심으로 선법을 폈기 때문에혜능선을 남종선(南宗禪)이라 합니다. 이리하여 남북 선종이 양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달마선은 당나라 시대에 그 황금기를 맞이 합니다황벽(黃檗 ~ 857)선사나 임제 (臨濟 ~867)선사에 의해서 전성기를 맞이 했습니다
이 때에 임제종풍(臨濟宗風)이 일어나고 위앙종(潙仰宗),  조동종(曹洞宗), 법안종(法眼宗), 운문종 (雲門宗)이 출현했는데  5종이 다 달마선 계통, 특히 혜능선사의 계통에서 나온 선종입니다.
5종 중에는 바로 임제종이 중요하고 임제종 안에는 황룡(黃龍 : 1002~1069)파와 양기(楊岐 ; 992~1049)파가 있어서 이것을 통털어서 오종칠가의 달마선풍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선의 자오자증(自悟自證)의 실제

 

지금까지는 선의 의의나 역사적 과정을 중심으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선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인간의 마음에 두용되고 어떤 방법으로서 실천되어 왔느냐 하는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즉 선의 정신적 체험과 생활적 실제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가대사(永嘉大師)의 증도가(證道歌)라고 하는 저술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처음부터 이러한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은 부제망상불구진(不除忘想不求眞)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욕구도 초월해서 가나 오나 마냥 한가한 도인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분들은 어떤 망상 근심을 없애려고 하지 아니하고, 어떤 참다운 것을 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없애려 하는 생각도 없고, 구하려고 하는 생각도 없는 세계가 바로 선의 세계인 것입니다
선에서는 관념적인 행위를 일체 배제합니다.
이리하여 모든 관념을 물리치고바로 현재 이 순간에서 실제로 수용하고 실제로 자유자재하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경전에서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속에 들어가는 것이 자유자재하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선에서는 바로 일상생활 속에서 우주를 던지기도 하고 자기 안으로 집어 넣기도 한다. 전체의 세계와 우주를 자기 마음대로 들여놓기도 하고 내놓기도 하여 마음대로 하는 것이 바로 선이다."

이런말을 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논술하기를,

"선의 입장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문밖에 나가는 것은 그것이 바로 전체의 우주를 밖으로 내던지는 일이요, 밖에 있는 티끌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이런 등등의 말씀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에서는 가는 것이나 오는 것이나, 앉는 것이나 눕는 것이 그대로가 다 진리이고그대로가 다 해탈이고, 그대로가 다 자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 기본입니다.

 

그리하여 선에서는 지나간 일을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돌아오지 않은 일을 생각한다던지  그런 것이 아니고 생각이 현재 속에서 통일됩니다.
이것이 현재일념(現在一念)이라고 합니다
바로 지나간 것은 지나갔기 때문에 없고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인데, 인간의 생각은 과거 일이나 미래 일에 빼앗겨서 현재를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선에서는 바로 현재의 한 생각에서 모든 것을 수용하고, 실천하고 , 응용하고, 자유자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선의 입장에서는 두 가지 감정을 초월합니다.
보통 사람의 감정에는 취할 것과 버릴 것, 사랑할 것과 미워할 것으로 분산됩니다.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은 취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버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은 사랑하고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미워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 선에서는 이와 같은 취사와 애정의 감정을 초월해서 항상 평상심(平常心), 자연심(自然心)으로 생활하는 분들이 바로 선사들의 감정이고 생활방식입니다.

 

그 예를 하나 든다면, <전등록(傳登錄)>이라고 하는 책 제2권에 보면 '시야다'라고 하는 선사가 계셨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도()를 구하지도 아니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과 생활이 잘못되지도 않았다. 나는 부처님께 예배도 드리지 않지만, 또는 경만한다든지 오만한 마음이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또 나는 고행도 하지 않지만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고 또 방탕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는 또 하루에 밥을 한 번씩 먹는 그러한 식생활도 하지 않지만, 공연히 간식을 많이 먹지도 아니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만족도 모른다. 그러나 욕심도 일으키지 않는다. 때문에 마음에 어떤 희망하는 , 안타까와 하는 것, 가지려고 하는 것, 이러한 마음이 없는 것이 진리다그것이 도()."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바로 선의 일상적 체험의 감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이라고 하는 최고의 경지는 불취불사(不取不捨)의 평상심(平常心)입니다.
취하려고 하는 마음도 초월하고, 버리려고 하는 마음도 초월해서 항상 마음이 한결같고 늘 청정하고 자연스러워서 어디에나 자연스럽게 응하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감정은 어떤 것은 버리지 못해서 한이고 어떤 것은 구하지 못해서 한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떤 것도 구할 것이 따로 있고 버릴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이 세상에 있는 것은 다 있어야 할 것이고,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유독 인간의 감정은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보지 못하고, 없는 것을 없는 것으로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이리하여 때로는 있는 것을 없애려고 하고, 없는 것을 만들어내려 합니다.

 

그러나 선에서는 이러한 것을 일체 배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평등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평등한 마음으로 활용을 해서 항상 평상심(平常心), 여여심(如如心)으로 지냅니다.

 

그리고 선의 감정은 특별한 호기심도 없고 또 특별히 따분한 마음도 없습니다
늘 마음이 한결같고 늘 감정이 평상스런 상태, 그것이 선의 감정입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확대되면 살고자 하는 욕망도 없지만 죽고자 하는 욕망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생사를 초월한 선의 경지입니다.

 

일반 사람의 감정은 더 살기를 희망하고 죽기를 외면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만이것이 한 번 잘못되면 살고자 하는 감정이 금시 죽고자 하는 감정으로 바뀝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마음은 어느 때는 굉장히 살고 싶다가 어느 때는 또 죽고 싶은 감정이 나옵니다.
그러나 선의 입장에서는 살고자 하는 마음도 초월하고 죽고자 하는 마음도 초월해서 살고 죽는 데 일체 걸림이 없고 항상 자유자재하고 넉넉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선의 세계입니다.

 

이런 선의 세계에 도달한 분들을 '한도인(閑道人)'이라 하고 '요사인(了事人)'이라 합니다. 세상의 할 일을 다해 마친 분들이란 뜻입니다.

 

어느 선사께서는 다음과 같은 법어를 남기셨습니다.

어느 분이 그 선사를 찾아 가서,

"어떤 것이 대열반(大涅槃, 최고의 해탈)의 해탈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은 대답하시기를,

"생사업(生死業)을 짓지 않는 것이 대열반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생사업입니까?"

질문하니까

"대열반을 구하는 것이 생사업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이 선사께서는 바로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선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배고프면 밥먹고, 졸음이 오면 잠잔다이것이 바로 나의 선이고 나의 도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여기에 질문을 하는 사람은 또 말하기를,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하는데 그러면 모두가 도가 높고 참선을 많이 한 스님과 같은 것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니 전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와는 전혀 같지 않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시는데,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도 밥을 먹지 않고 백 가지를 생각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잠잘 때도 잠자지 않고 천 가지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와는 전혀 다르다. 도를 아는 사람은 오고 가는 것이 모두 도이고, 또 일상생활이 그대로 깨달음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기에 바로 선과, 선 아닌 것이 나타납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밥을 먹을 때는 밥 먹고, 잠을 잘 때는 잠 자고, 갈 때면 가고, 올 때는 오는 것으로 족해서 자연스럽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의 감정은 갈 적에도 오는 걸 생각하고, 오면서도 가는 걸 생각하고밥 먹으면서도 온갖 걱정에 사로잡혀 있어서 일상 생활 속에서 공연한 걱정 근심을 일으키고, 그 걱정근심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 보통 중생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선사는 그런 일체의 감정을 다 초월했기 때문에 항상 자유자재합니다.

 

이렇게 되면  극도의 자존심이 생깁니다. 극도의 자존심이 생길 때 진리와 내 마음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하는 말씀을 몸소 수용하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선의 경지를 전통적인 용어로 말을 할 때 일행삼매(一行三昧), 반야삼매(般若三昧), 일상삼매(一相三昧), 현전삼매(現前三昧)라고 합니다.
이리하여 백천 가지 삼매를 현재의 한 생각에서 응용하고 자유자재하는 것이 선의 최고의 체험세계이고 최고의 활용세계인 것입니다.

 

정중선(靜中禪)의 실제

 

선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세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가 다 응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선을 먼저 기초적으로 잘 닦아야 합니다.
이에 선을 기초적으로 닦아 나가는 데는 고요한 곳에서의 정중선(靜中禪)과 시끄러운 곳에서 하는 동중선(動中禪)으로 구분이 됩니다.

 

고요한 곳에서 하는 선은 우선 여러 가지 복잡하다든지 소란한 곳이 아닌 조용하고 정숙한 곳에 앉아서 화두(話頭)를 참구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자신을 오래 반성하는 일입니다.
각자 어떤 분의 지도를 받아가지고 고요한 환경 속에서 참선 수련을 하는 것을 정중선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동중선(動中禪)의 실제

 

그 다음은 동중선입니다.

시끄러운 속에서도 능히 선을 해야합니다.

일제시대에 크게 활약하셨던 한용운(韓龍雲)스님 같으신 분은,

"선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조용하게 하는 것이지 어떤 환경을 조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환경을 너무 조용하게 하다 보면 염세적인 성격이 나타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선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몸만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이것은 독선(獨善) 해당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교는 염세성이나 독선성이 아니고 그대로 자비의 실천입니다
자비의 실천을 하는 데는 선에 있어서 고요한 곳에서도 해야 하지만, 시끄러운 속에서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송나라 때 대혜(大慧 1088 ~1163)선사께서는,

"시끄러운 속에서 참선에 대한 힘을 얻으면 그것은 고요한 곳에서 얻는 것보다 백천만 배가 더 낫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끄러울 때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키면 이것은 그 마음을 요란하게 할 뿐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사람의 감정은 고요한 곳을 좋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선을 할 때 시끄러운 속에서 참선이 어떻게 잘 되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시끄러운 곳에서 하는 선을 요중공부(擾中工夫)라고 말합니다
시끄러운 속에서도 참선하는 것은 밖에 아무리 시끄러운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시끄러운 대상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반조하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자기가 의심하고 참구하는 화두에 정신을 전념하는 것, 이것을 바로 요중공부라고 합니다.
아무리 다른데가 시끄럽다고 하더라도 시끄러운 데 관심두지 아니하고, 시끄러운 것을 조용하게 만들려고 그것과 모순적으로 대결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가 공부하는 데만 집중하고 열중하다 보면 이것이 바로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한 것을 항상 느낄 수 있는 제일 좋은 공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선이라고 하는 것은 고요한 곳에서도 해야 하고, 시끄러운 곳에서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의 정중선 동중선입니다.

 

 

선의 응용의 실제

 

그 다음으로는 이러한 선을 일상 사회의 생활이나 일반 생활 속에서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응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대생활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여기에 응용할 수 있고 복잡한 생활 속에서도 참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생활을 다 물리치고 참선만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이 부분을 일반 불교의 전통에서는 어떻게 생각해 왔고 어떻게  지도했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고 이것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선의 서적 중에 중요한 책의 하나가 대혜선사의 <서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장에서 무슨 말씀을 했느냐 하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이 다 선이다."

이렇게 말씀했읍니다. 선은 어떤 데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속에서 참선이 이루어 지고 또 참선 속에서 생활이 이루어져야지, 선은 선대로 있고 생활은 생활대로 있으면 올바른 선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 예를 하나 든다면,

"사람을 응접할 때는 응접하는 것으로 족하고 또 고요히 앉아서 참선을 할 때는 고요히 앉되, 앉는 것만을 참선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하여 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앉는 것만 제일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것을 일체 물리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선의 묘용(妙用)이 나오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진리는 현상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관계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을 활기있고 자연스럽게 유지해가는 것이 선의 활용입니다.

 

그런 까닭에 선사들은 죽는 데도 편안하게 죽고 사는 데도 편안하게 삽니다
모든 환경속에서 쾌활하고 자유자재하고 생기발랄하고 활기에 넘치는 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이 되려면 바로 의식을 현재에 집중시키는 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선을 일상 생활에서 응용하는 데는 우리의 의식, 즉 우리의 생각을 현재의 순간에 잡중시키는 일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추억과 미래에 대한 불안 내지는 막연한 호기심 등 이런 것들이 머리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망상(忘想)이라고 하는 것이 공연히 끝없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현재의 순간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항상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이나 앞으로 닥쳐올 것에 대한 불안때문에 현재 자기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또 현재에의 집중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능률적으로 처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데는 현재 자기가 무엇을 하던지 그 현재의 행위속에 의식을 집중시켜서 모든 잡념을 추방하는 일, 그것이 바로 선의 응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일념으로 순수한 생각으로 의식을 집중해서 정진해 가다 보면망상은 거기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
망상에 이끌리지 않는 것이 바로 참선이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일체 행위에 응용할 때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은 선의 응용이다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절에 가서 기도를 하는 분은 기도를 할 적에 다른 생각을 물리치고 기도하는 데만 마음을 집중하면 그것은 바로 기도로서 참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기도를  시작하면 많은 생각이 들끓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게 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잘못되는 기도입니다.
왜 잘못됐느냐 하면, 기도하는 데 마음을 두지 않고 공연히 다른 곳에 생각이 이끌려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불하는 순간에 염불하는 내용에 정신과 의식을 집중하면 그것은 염불선이요. 공부하는 내용에 정신을 최대한 집중하면 그것은 공부선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도 온갖 다른 데 정신을 빼앗기면 선의 응용에서 불 때 잘못된 것입니다.

 

요즈음 학생들은 공부를 할 때 라디오를 크게 켜놓고 공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그런 모습을 볼 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라디오를 켜놓고 공부를 하면 그 라다오 내용에 정신이 분산돼서 공부에는 능률이 안 오르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공부를 하면 딴 생각이 떠오르는 데도 라디오를 켜 놓으면 라디오 소리 때문에 딴 생각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려운 말로 연쇄반응 제어장치라고 합니다.
어떤 연쇄반응을 통해서 자기의 복잡한 생각을 중지시킨다고 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다 보면 습관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제어장치가 없이도 그대로 참선이 잘 될 수 있고 집중이 잘 될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되어서 선은 어떠한 일을 하던간에 자기의 행위, 자기가 하는 어떤 일에 정신을 최대한으로 집중한다면 그것이 바로 선의 응용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현대 생활에 있어서 모든 일을 능률적으로 활기있게 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선을 알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응용하고 어떻게 선으로 말미암아 생활을 좀더 기름지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추구해 봐야 합니다
이렇게 선적인 방향으로 하게 되면 자기가 하는 일에 열중할 수가 있고, 열중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허전한 감정이라든지 또는 답답한 감정이라든지 또는 쓸쓸한 감정 등 이 모든 여러 가지 쓸데없는 걱정근심을 다 추방해서 스스로 그야말로 선의 경지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기계에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무슨 일을 해도 하는 일에 집중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데 의식이 집중되지 않으면 항상 마음이 공허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선의 바람직한 응용을 통해서 자기가 하는 일에 의식을 집중하고 정열을 들일 수 있는 그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옛날 구지(俱脂, 중국 스님)선사라고 하는 선사가 계셨습니다
그 선사는 어린아이[동자]를 하나 데리고 있었습니다.
이 구지선사는 누가 와서 무엇을 물어도 항상 손가락 하나만 내보이시면서, "요것 뿐이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구지선사가 외출을 하고 없는 사이에 어떤 사람이 구지선사에게 불법을 묻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때에 그 어린아이는 스승의 흉내를 내어 찾아온 사람에게 "요것 뿐이다." 하고 대신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구지선사는 자기가 자신의 마음으로 확실히 알고 그런 말씀을 했지만, 그 어린아이는 모르고 흉내만 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천지 차이입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습니다.
행동은 똑같이 했더라도 그 마음이 확실히 됐느냐 안됐느냐에 따라서 선일 수도 있고 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슨 생활을 하든지 마음없이 건성으로 할 때 항상 가슴이 허전하지만매사에 소신을 가지고 정신을 집중해서 확실하게 해 나간다면 그 가운데 기쁨이 있고 그 가운데에 모든 일을 능률적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점을 특히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선의 역사적 과정과 그 생활에 있어서의 응용실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春有百花秋有月   춘유백화추유월

夏有凉風冬有雪   하유양풍동유설

若無閑事掛心頭   약무한사괘심두

便是人間好時節   변시인간호시절

 

봄에는 꽃들이 좋고, 가을에는 달빛이 좋으며

여름에는 산들바람이 좋고, 겨울에는 흰 눈이 좋도다.

이에 공연한 일로 마음 상하지 않는다면

인간생활에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어랴.